- [ESSAY] 甲이 스스로 乙이 되다
- 조선일보 2013.05.29(수) 조정민 목사·前언론인
- 힘·돈 있고 인기 높을수록 수퍼甲 떠나면 그만인데 기세 등등한 사람들
팔에 걸린 옷이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동화속 '세탁소 옷걸이'의 교훈 알까
이 지긋지긋한 관계서 세상 구하려 인간이 된 神, 스스로 '乙의 길' 택해
갑과 을의 얘기가 그치지 않는다. 모두 갑돌이와 을순이 얘기 때문에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귀에 익었다. 갑자을축… 육십갑자 때문에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눈에 익었다. 요즘 들어서는 한 맺힌 을의 하소연과 태산처럼 버티는 갑의 위용 때문에 갑과 을은 더욱 익숙해졌다.
갑과 을에 관한 기사를 대하면서 마음속으로 탄식한다. "해도 해도 너무하는구나…." 갑은 알고 보면 대부분 사람이 아니다. 대부분의 갑, 갑 중의 갑, 소위 '수퍼 갑'은 조직이고 기관이다.
그런데 그에 속한 자들이 밖에서 모두 갑이 되어 행세한다. 그곳을 떠나는 순간 내가 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텐데 잠시 무엇에 씌어서 사는 탓인지 막무가내로 기세가 등등하다.
그들이 잠시 몸담고 있는 갑의 내부는 어떨까. 그 속에서는 다시 수많은 갑과 을의 이야기들이 전해진다. 힘 있는 곳일수록, 돈 많은 곳일수록, 인기 높은 곳일수록,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고 전신에 피멍이 든 속사정들이 끝없이 들려온다.
갑을과 무관해야 할 가정들은 어떤가. 집이야말로 갑을이 없는 무풍지대인가. 오히려 집집마다 갑과 을의 힘겨루기로 날이 새고 날이 진다. 예전에는 대부분 시댁 가족들과 갑을 시비가 잦았는데 요즘은 갑을 전선이 전방위로 확산되었다. 크는 을 때문에 갑이라고 여겼던 부모들의 한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신혼 초부터 갑의 지위를 선점하려다가 결혼 생활 일 년도 되지 않아 원수처럼 헤어지는 커플이 수도 없다. 놀랍게도 20년, 30년을 부부로 살고도 갑과 을의 위치가 불안정해서 기어이 갈라서고야 마는 중년·노년의 부부도 해마다 급증하는 추세다. 이렇듯 갑을 의식과 갑을 관행에서 비롯된 마찰과 갈등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동안 결코 피할 수 없는 아픔이다.
-
- 甲이 스스로 乙이 되다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그렇다면 갑과 을의 관계는 모든 개인 대 개인, 기관 대 기관, 조직 대 조직 사이에 일어나는 불가피한 현상인가. 오히려 그 이상이다. 인간 내면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면 갑과 을은 내 안에 얽히고설킨 풀어지지 않는 끈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굴곡과 상처이다.
거절당한 분노가 있고,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있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들 때문에 원망과 좌절이 있다. 틈만 나면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마치 요철과 같은 불안정한 내면 세계가 도사리고 있고, 기회가 닿기만 하면 나를 드러내고 내세우고 입증하고 과시하고픈 여리고 여린 자아가 있다. 어쩌겠는가. 너나 할 것이 없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않고 그런 입장에 처하지 않아서 갑의 행세를 못할 뿐이고, 내게 그런 일이 주어지지 않았고 그런 대접을 받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지 않아서 을의 서글픔에서 비켜서 있을 뿐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갑이 되고픈 욕망과 언제나 을에서 벗어나고픈 열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정채봉 선생의 짧은 동화 '옷걸이'는 손톱만큼이라도 힘이 생기면 갑의 행세를 하려 드는 심리증후군을 폭로한다. 세탁소에 걸린 수많은 옷걸이가 있다. 고참 옷걸이가 신참 옷걸이들을 가르친다. "절대로 네 팔에 걸린 옷이 너라고 착각하지 마라." 옷걸이들이 알아들었을까. 아니 사람들은 알아들었을까. 알아듣는다 해도 선배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일생 겸손하게 살아낼 수 있을까.
아마 인간이 그렇게 겸손한 세상을 꿈꾸었다면 인간의 힘으로 그런 세상을 세울 수 있다고 착각한 탓이다. 그리고 그런 착각이 극에 달했던 20세기에만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비롯한 이념들이 갑을 몰아내는 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었지만 갑과 을의 자리바꿈에 지나지 않았다.
완장을 바꿔 차기는 했지만 더 많은 을이 태어났고 더 비싼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이념이 시들해지면서 불기 시작한 세계화 열풍 속에 확장된 갑을 구도는 이제 전 지구적이다. 유일한 갑이 되어야 살아남는다는 위기의식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고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 있고, 유토피아를 향해 몸을 던지는 사람이 있고, 새로운 갑을 관계 설정을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는 사람이 있다. 출구가 있을까. 갑을 의식이 사라진 삶의 지평이 보름달처럼 두둥실 떠오를 수 있을까. 정말 가능한 일이며 누가 해답을 알고 있을까.
따지고 보면 갑을 관계가 사라진 삶의 모델이 시대를 초월해 추구해 왔던 우리 모두의 과제이다. 단순히 갑과 을이 뒤바뀌는 혁명이 아니고 그렇다고 안정을 이유로 고착된 갑과 을의 질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 대등하게 존중받는 세상을 향한 갈증이 가장 타는 목마름인 까닭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갑과 을의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답을 위해 신이 인간이 되었다. 세상을 갑을 관계에서 구출하기 위해 수퍼 갑이 십자가에서 을이 되기로 결정했다.
그를 따르기로 결정한 사람들도 모두 갑의 자리를 박차고 스스로 을이 되었다. 그들이 을이 되는 순간 모두가 갑이 되었고 갑을 의식도 사라졌다. 그러나 교회조차 또 다른 갑의 행세를 한다면…. 이 땅에는 더 짙은 어둠이 내릴 것이다.
'시사정보 큐레이션 > 국내외 사회변동外(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셜 큐레이션 시대, 수많은 큐레이터가 존재하는 소셜미디어 세계 (0) | 2013.06.08 |
---|---|
'세상을 변화시킬 중요한 5가지 힘'을 융합하여 '창조적 미래의 일'를 선택하자 (0) | 2013.06.02 |
미래의 일은 '전통적인 거래'에서 '미래 준비적인 거래'로 옮겨가야 한다 (0) | 2013.05.27 |
정보사회에서 창조사회로의 전환은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버금가는 변화이다 (0) | 2013.05.25 |
[스크랩] 실업률 감소의 핵심은 `창업 한국` (0) | 2013.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