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국가, 관료주의 그리고 세월호] 시스템과 영웅 물신과 광신사이

배셰태 2014. 5. 6. 22:32

시스템과 영웅 물신과 광신사이 

한겨레 2014.05.02(금) [2014.05 제19호]

http://na-dle.hani.co.kr/arti/issue/712.html

 

[나들의 초상] 국가, 관료주의 그리고 세월호

 

사람들은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며 우울-불안-격분-무력감 등의 감정 사이를 오간다.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기능하지 않은 시스템에 대한 무력감이 무엇보다 컸다. 경기도 안산 단원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임시 합동분향소가 마련된 올림픽기념관으로 가기 위해 사람들이 줄지어 선 모습.한겨레 이정용

 

그것은 무력감이었다. 사람들은 가라앉는 세월호와 그 안에서 숨져간 이들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과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깊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 무력감이 어떤 이에겐 격분과 공격성으로, 어떤 이에겐 슬픔과 우울로, 어떤 이에겐 미안함으로 표출됐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저 감정들 사이를 오가는 사람도 있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태연한 척하다 어느 순간 터져버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도 했다. 세월호 안에서 숨져간 이들의 심상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느끼는 공포를 유언비어에 담아 빠르게 확산하는 이들도 있었다. 유언비어 유포는 내가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사회가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확인하고 공감을 얻은 뒤 재빨리 안도하기 위한 자기 위안적 행위였다.

 

총체적인 시스템의 몰락

 

<중략>

 

격분과 희생양 찾기의 폭력과 배제

 

<중략>

 

격분하는 소비사회가 낳은 포즈의 ‘정치’와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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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은 왜 작동하지 않았나

 

<중략>

 

그러나 시스템은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시스템은 돌아가야 한다.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가장 피해를 보는 이들은 사회와 매개할 자본이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시스템을 배반하는 탈시스템이 시스템으로 보이는 이런 착시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우선은 사라진 국가, 즉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시스템에 대한 성찰 아닐까. 김상봉은 이렇게 물었다. “공화국이란 무엇입니까? 원래 이 낱말은 로마인들이 자기네 나라를 가리켜 부른 이름입니다. 라틴어로는 레스 푸블리카(res publica)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는 공공적인 것(public thing)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푸블리카라는 형용사는 포풀루스(populus), 즉 인민(people)이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레스 푸블리카를 레스 포풀리(res populi)라고 풀이했는데, 이 말은 인민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인민이란 계급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나라 구성원 전체로서 겨레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나라가 특정한 집단이 아니라 ‘모두의 것’일 때 그것이 참된 공화국인 것입니다.”

 

공화국의 이름을 복원한 뒤에 필요한 것은 시스템의 공공성에 대한 성찰이다. 이 성찰을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어느덧 존재하지 않는 이름이 된 공공성은 시스템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체들의 집단적 노력으로 복원되는 것이 아닐까. 자본주의적 사유화로 몰락한 탈시스템의 상태에서 공공성을 탑재한 강력한 시스템으로 환원시키는 작업은 강력한 시스템 안에서 시스템을 체화한 주체, 하나의 부품이지만 빠져서는 안 되는 총체성으로 기능하는 주체들이 성찰적으로 존재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시스템이란 결국 개인의 탁월성에 기반한 어떤 추상적 공리가 아닐까. 그 추상적 공리를 위해선 시스템과 관계의 물화를 해체해야 하고, 그 해체의 선봉에 대중의 정치성이 서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복원돼야 하는 것은 시스템 이전에 정치가 아닐까.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선 의회주의라는 시장자유주의의 장치 너머를 상상하고 시장자유주의라는 탈시스템 외부를 조망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격분과 폭력의 발현, 상대의 절멸을 바라며 권력을 교체하자고 호소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 너머를 상상하는 근원적 고민, 발본적 정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