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칼날을 세워라
너 나 할 것 없이 진리를 구하고자 하지만, 세상은 편견과 선입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습성이 있습니다. 기쁘면 모든 것을 좋게 보고, 슬프면 모든 것을 슬프게 봅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말 그렇다고 단정하면 큰 오산입니다.
우리에게 도달된 지식은 사람들의 편견에 의해 왜곡되어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전달되는 과정이 길수록 정보는 더욱 왜곡됩니다. 정보는 전해지는 과정에서 거치는 사람들의 감정과 편견이 더해져 처음의 사실에서 많이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전달된 정보를 판단 없이 믿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그 정보가 확실한 것인지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자는 "길거리에서 들은 말을 길거리에서 말한다면, 이는 덕을 버리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더욱 당황스럽게 하는 것은, 세상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반되는 현상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에는 슬픔이, 사랑에는 증오가, 믿음에는 배신이 따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어느 순간 깨달은 지식을 절대적으로 신봉해서는 안 되며,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세상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여서도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고통에 빠졌다고 하여 세상을 부정적으로 봐서도 안 됩니다.
자신이 본 세계가 전부이며 절대적인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되며, 상대방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마음과 아량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하고 아량이 있는 사람은 소통을 통해 다른 사람의 소중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집이 강한 사람은 독단에 빠져 미망(迷妄)에서 헤어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비판 정신을 일깨워 줘야 할 인문학이 빛을 잃은 까닭은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관념과 논리에 빠져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지적 만족을 위해 자신만의 논리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해 왔습니다. 대중은 그들의 난해한 논리를 따라갈 수 없어 읽기를 포기한 지 오래되엇습니다. 그래서 인문학은 대중에게 외면을 받았습니다. 그런 면에서 철학자 칸트는 철학상의 공로에도 철학을 대중에게서 멀어지게 한 대표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학자들이 양심을 팔아 세상에 아부한 것도 대중이 등을 돌린 이유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학자들은 노예제를 정당화하였고, 중세시대에는 교회를 정당화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근대에와서는 자본주의 논리를 계발하더니 공산주의가 몰락하자 시장 경제만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설교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고 있는데도 학자들은 시장 경제를 운운하며 현 상황의 주범인 자본주의자들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표방한 자본주의는 자기 존중의 원칙에만 충실한 이데올로기입니다. 타인 존중의 원칙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유 경쟁과 발전의 논리만을 앞세워 가진 자들의 탐욕을 정당화하며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켰습니다. 상위 1퍼센트를 위한 부의 창출을 위해 세계를 자본주의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학자들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주장하며 자본주의 이념을 최고인 양 떠들며 가진 자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이처럼 교활한 학자들이 권력과 결탁하고 그럴듯한 학설을 만들어 민중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으려 합니다. 공자는 이런 교활한 학자를 일컬어 `덕의 도독`이라 하였습니다.
`덕의 도둑`들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시대를 지배하는 `허위의식`을 폭로하는 비판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비판 정신은 사회 구조적 비리를 감시하고 고발하여 사회적인 불행을 사전에 차단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마음의 양식입니다. 만일 비판 정신이 사라진다면 모두가 `소외된 인간`으로 전략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민중의 소리를 대변하는 인문학의 부활을 통해 비판 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없다고 가정한다면, 지나치게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최고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조차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나는 아직 모른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정말로 우리의 지식에는 가능성과 확률만 존재할뿐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설픈 지식을 지나치게 확신합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논리나 지식으로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것을 단정 짓습니다. 지나친 자기 확신 역시 추락의 지름길이란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확실성`이라는 논리를 앞세워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정당화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역사의 심판은 냉혹하였습니다. 공산주의와 파시즘은 마찰없는 강제와 확고한 만장일치라는 환상에 빠져 스스로 무게를 감하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이런 맹목에 따른 파멸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크라테스처럼 무지를 자각해야 합니다. 맹목은 무지의 산물입니다. 비판 능력만 있어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무지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식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의 말에 얼마든지 진리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깨닫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열린 사고는 단편적인 지식에서 벗어나 보편적인 진리에 접근하게 합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는 것을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바로 진정 아는 것이다" 라는 공자의 가르침의 참뜻을 되개겨 봅시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상다반사 > 자기계발·동기부여外'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문맹도, 색맹도, 컴맹도 아닌 자맹이다 (0) | 2013.11.05 |
---|---|
기회가 찿아왔을 때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0) | 2013.11.05 |
그 누구보다 사랑스러운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0) | 2013.11.02 |
세상에서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존재는 자기 자신이다 (0) | 2013.11.01 |
자신의 한계와 그릇의 크기를 똑바로 알자 (0) | 2013.10.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