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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경제와 사회문화-조윤제 서강대 교수

배셰태 2013. 6. 29. 13:15

[중앙시평] 창조경제와 사회문화

중앙일보 2013.06.29(토) 조윤제 서강대 교수·경제학

 

새 정부가 내건 창조경제의 정의가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많다. 그러나 정부가 그것을 반드시 정의할 필요가 있을까? 이를 굳이 정의하려 들면 뜻이 좁아지고, 오히려 왜곡이 생기게 된다. 국민들은 이를 굳이 정의하지 않더라도 대충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와 같이 자본, 노동의 투입 증가를 통해 높은 성장률을 지속하는 것은 이제 한계에 달했으니 생산성을 높여 고성장을 지속하자는 뜻이 아닐까.

경제학에서는 이 생산성을 보다 구체적으로 총요소생산성(Total Factor Productivity)이라 표현하는데 이는 자본, 노동과 같은 요소 투입의 증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성장의 증가를 뜻한다. 즉 자본과 노동을 2%씩 증가시켰는데 경제는 5% 성장했다면 총요소생산성 증가에 의해 나머지 3%의 성장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일종의 ‘잔여(residual)’ 개념이다. 이 속에는 생산기술의 혁신뿐 아니라 노사관계, 경영효율성, 법, 제도의 개선 등 모든 것이 포함된다. 따라서 우리가 ‘창조’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향상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집단에 대한 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회는 양적 성장을 이루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혁신과 창의에 의한 질적 성장을 도모하는 데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스터 엔’으로 잘 알려진 사카키바라 전 일본 대장성 재무관은 2003년 브루킹스연구소에서 출간한 『일본의 구조개혁: 철의 삼각구조를 깨야』라는 저서에서 일본 경제는 10%만이 자유시장경제이고, 나머지 90%는 사회주의경제라고 비판한 바 있다. 계열사나 협회를 통한 담합으로 보호와 진입장벽을 쳐 시장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합주의, 특히 정부 관료와 각종 협회, 자민당의 결속으로 대표되는 철의 삼각구조로 도요타, 소니와 같이 세계 경쟁에 노출된 약 10%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본 경제는 묵시적 담합구조로 편안히 ‘나누어 먹기’에 안주해 일본이 90년대 이후 더 이상 자본, 노동의 증가에 기댈 수 없게 되자 곧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합에 기대고, 이를 유지하기 위해 각종 모임에 빠지지 않고 경조사, 명절에 얼굴을 내밀며 바쁘게 뛰어다니는 일본 사회는 지식과 창의력 면에서는 여전히 서구 선진국들에 뒤지는 상황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일본 사회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담합적 모임 중시적 문화와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

 

실력보다 연줄이나 관계가 중시되는 사회는 결코 지식사회, 창조경제로 나아가기 어렵다. 창의와 혁신은 치열한 경쟁에서 나오며, 그리고 그 바탕이 되는 것은 그 사회의 지식 수준과 합리적 제도, 관행이다. 담합구조의 혁파, 실력에 의한 공정 경쟁, 인사제도의 혁신이 바로 창조경제가 자랄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한다. 미래창조과학부만이 창조경제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정부의 지원을 강화해 창조경제를 이루려 해서는 지대추구(rent seeking) 행위만 성행시킬 뿐이다. 모든 정부 부처가, 그리고 국회와 정치권이 현재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각종 제도와 관행의 합리성을 제고시키고, 사회 전 분야에서 담합구조를 혁파해 공정경쟁 기반을 확대해 나갈 때 비로소 창조경제를 이뤄나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좀 더 개인주의적 문화를 존중할 필요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