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13.04.20(목)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사상
사람은 조류가 아니라 포유류다. 한데 우리 조상들은 알에서 나셨다니 묘한 일이다. 가야국의 김수로, 신라국의 박혁거세와 김알지, 고구려의 고주몽이 다 알을 깨고 나셨다. 알에서 나온 조상을 집단으로 모신 민족이 우리 말고 또 있는지 모르겠다.
이건 헤르만 헤세의 성장소설 <데미안>식으로 읽는 것이 좋을 듯하다. 알을 깨고 태어남은, 조류라는 뜻이 아니라 안목이 트여 재탄생하는 극적인 순간의 비유라는 것. 줄탁동시(啄同時)라는 말도 여기서 멀지 않다. 병아리가 알 속에서 쪼는 것이 ‘줄’이고 어미닭이 밖에서 쪼는 것이 ‘탁’인데, 이것이 ‘동시’에 이뤄져야 알이 깨진다는 뜻이다. 사제 간에 진리가 전수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르는 말이다. 병아리로선 캄캄한 알 속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찬란한 시간이다.
다만 알을 깨고 나오는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박혁거세의 알은 족장들이 깨트렸다. <삼국유사>는 여섯 부족장이 “그 알을 깨서 어린 사내를 얻었다”(剖其卵得童男)라고 일러준다. 곧 알을 깬 주체는 혁거세가 아니라 기존의 장로들이다. 반면 주몽은 “알을 깨부수고 나왔다”(破殼而出)고 했다. 알을 깨고 나옴의 신화적 의미는 관습과 전통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그는 알로 존재할 때부터 핍박을 받았다. 성장과정에서도 ‘왕따’였다. 장로들이 알을 깨준 혁거세의 삶과, 스스로 부수고 나온 주몽의 미래가 다를 것은 명백하다.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었으니 그의 임금노릇은 전통과 관습을 계승하는 것이었다. 반면 주몽은 기존의 부여국을 뛰쳐나와 새 나라를 건설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에 대한 시비가 분분하다. 나는 경제에 문외한이라 그 내막은 잘 모른다. 다만 그 이름이 ‘창조’경제인 한, 혁거세의 길이 아니라 주몽의 길로 가자는 뜻일 것이라고 추측한다. 사실 주몽설화는 창조를 위한 모티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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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양한 모티브들은 창조경제를 위한 조건들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창조란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주몽에게 부여국이 이미 존재했듯, 기존의 지식들을 바탕으로 창조가 탄생한다. 다만 낯익은 것들을 ‘낯선 문법’으로 읽어내고 용기를 갖고 그 새로운 안목을 표현하는 과정이 창조일 따름이다.
문득 “예술은 사기다”라는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일갈이 떠오른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는 평면적 작업을 회화로 여기던 상식을 부수고, ‘비디오의 동영상 역시 그림이다’라는 남다른 생각을 남보다 먼저 하고, 남보다 깊숙이 실천으로 옮겼음을 ‘사기’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창조의 겸손한 표현이 사기인 셈이다.
김종인 전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창조경제의 핵은 인문학적 상상력”이라던 지적도 근사하다. 지난 4월, 한 인터뷰에서 그는 “창조경제를 얘기하니 다들 ‘기술’ 얘기만 하더라. 미래창조과학부란 이름에도 기술이란 단어를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집어넣지 못하게 했다. 창조경제의 핵은 ‘인문학’이다. 세계 유수 선진기업들의 CEO를 봐라. 대부분이 인문학 출신들이다. 그들의 인문학적 상상력, 창조적 파괴가 기업을 이끌고 있다.”
경제가 일상의 바깥이 아니라 생활 속에 존재하는 것이면, 창조경제도 창의적인 생활 속에서 나오게 마련이다. 창조경제는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만들게끔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난데없는 질문을 하면 왕따가 되는 학급, 교과서라는 자료집(교과서는 ‘책’이 아니다)을 암송하는 학교, 일제고사를 치르는 나라에서는 혁거세는 나올지 몰라도 주몽의 후예는 태어나지 못한다.
창조경제의 마당이라는 인문학은 특정 전공분야를 두고 이르는 말이 아니다.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볼 수 있는 눈을 기르는 공부요, 그 새로운 안목을 잘 표현하도록 이끄는 과정을 이르는 것이다. 어떤 공부든 무르익다보면 ‘줄탁동시’의 순간이 오고, 그 안목이 트이는 순간이 창조의 시간이다. 설화집을 탐독하던 아이가 물리학의 발견자가 된 사례는 아주 많다. 이번 여름휴가에는 낡고 늙은 설화집 <삼국유사>를, 촛불 밑에서 읽어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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