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 칼럼] 한국 청년 잔혹사
중앙일보 2016.08.08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http://news.joins.com/article/20419144
불볕더위가 점령한 도심은 적막하다. 휴가를 갈 수 있는 사람은 떠났다. 비행기로, 기차로, 승용차로 평소 바쁜 일상 속에서 점지해둔 힐링의 마을을 향해 떠났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격무에 시달리던 심신을 유혹한 어느 광고 카피처럼 몇 장의 신용카드와 휴가비를 단단히 챙겨 넣고 떠났다. 떠나지 못한 사람들이 삼복더위에 지친 도심을 지켰다. 열심히 일하지도 못했고, 열심히 일할 기회도 없고, 열심히 일할 전망도 보이지 않는 세대, 청년세대 말이다. 다음 학기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편의점 알바, 식당 파트타이머, 가정교사, 그리고 스펙 쌓기에 여념이 없는 취업준비생, 시험을 앞둔 각종 고시생, 임시직과 일용노동자.
여기에 대학입시에 올인하는 고등학생 200만 명을 합하면 16~29세 청년세대가 텅 빈 도심을 지켰다는 말이 된다. 의당 그래야 한다고? 그들은 휴가를 즐길 자격이 없다고? 아니다. 한국처럼 청년세대에 잔혹한 나라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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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와 여가는 시민교육이다. 청년 시절에 시민정신을 길러 공존사회를 만들라는 준엄한 명령이고, 미래 역량을 쌓아 노후를 책임지라는 기성세대의 보험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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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활동수당’을 강행한 서울시에 대해 여당 대변인이 쏟은 독설이 그렇다. 그렇게 말렸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킨’ 박원순 시장은 ‘소통의 절벽이자 독불장군’이라는 것. 이유는 걸작이다. “성실한 청년의 꿈과 의욕을 저하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조장한다.”
거꾸로 묻고 싶다. 청년들이 절규하는 동안 정부와 여당은 무엇을 했는지를. 서울 청년 144만 명 중 겨우 3000명, 1년 예산 90억원 정도를 그나마 ‘청춘유지비’로 ‘살포하는’ 것이 박원순 청년도당을 규합하는 일인가? 프랑스 ‘여름 연대’ 예산은 수백억원, 호주의 청년수당은 노령연금과 합해 수십조원에 이른다. 청년수당·공공산후조리원을 외친 이재명 성남시장을 정부가 틀어막았다. 모두 청년을 위한 고육지책임에도 ‘보편적 복지’가 아니라는 이유다. 위화감을 조장하지 않는 청년적응수당을 신설하면 되지 않는가. 정보영상세대의 필수품인 인터넷 비용, 신문 저널 구독비, 교통비, 취업훈련비, 구직비 등 청년복지 선진국들이 짜낸 프로그램 명칭은 다양하고 길다. 입 발린 소리만 해대는 정부, 자신이 구축한 생존법칙에 청년세대를 가둬 버린 기성세대에게 그런 리스트는 외계인의 발상이고, 자수성가한 세대, 기업 살리기에 12조원을 쏟는 정부에 청년 현금 살포는 부도덕할 뿐이다.
그런데 한번 인구구조를 보라. 10~29세 연령대 1240만 명이 50대 이상 1750만 명을 먹여 살려야 할 날이 곧 다가온다. 9세 이하 아동인구는 450만 명으로 반 토막 났다. 20년 후 1명이 4명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생지옥이 된다. 청년수당은 미래 세대에 대한 작은 저축일 뿐인데, 지난 국무회의에서 서울시장과 보건복지부·고용노동부 장관 간 오간 ‘격론’은 불과 10분 정도였다. 보도에 의하면 대통령과 각료, 수석들은 침묵했다. 하찮은 일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봇물 터질까 두려웠을까. 그런데 다음날, 대통령은 저출산 문제를 ‘국가 존망이 걸린 국정 제1과제’로 규정했다. 특별기구를 만들었다고도 했다. 청년수당조차 거부하는 판에 애 낳을 작은 집과 일정 소득을 어찌 보장한다는 말인가. 청년일자리를 위해 시작된 노사정 합의도 제 밥 챙기기로 해산했다. 청년을 불볕더위로 몰아넣는 현대판 노역제, 이것이 한국 청년 잔혹사의 현 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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