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와 성찰]‘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한겨레 2015.01.09(금) 이문재 |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501092041425&code=990100
어떤 경우에는 구체적인 에피소드보다 통계 숫자가 더 충격적일 때가 있다. 설렁탕 값과 장례비를 봉투에 넣어놓고 스스로 생을 마감한 독거노인에 관한 뉴스도 안타깝지만, 지난해 남성 노인 자살률이 전체 자살률(인구 10만명당 28.9명)의 6배에 달한다는 통계 수치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20여년 전만 해도 먼 나라 얘기였던 자살률이 이혼율, 저출산율에 이어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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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스럽지 못한 세계 최고는 또 있다. 인류 탄생 이래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속도로 다가오는 초고령화 사회다. 그렇잖아도 늙음이나 죽음을 무슨 질병처럼 백안시하는 사회인데,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사회 전체가 노인을 외면하거나 무시, 방치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대한민국의 노인은 삼중고에 시달린다. 외롭고 아프고 가난하다. 외롭고 아프고 가난해서 자기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 채 무기력과 자괴감에 짓눌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 코맥 맥카시의 소설 제목처럼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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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와 같은 시스템, 즉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우리 생애의 후반기는 이미 정해져 있다. 특히 베이비붐 세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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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비관적인 상상이다? 그렇지 않다. ‘녹색평론’ 최근호 좌담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서울대 학생들한테 부모가 언제 죽으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63세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은퇴해서 퇴직금 남겨주고 바로 죽는 게 좋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서강대 교수가 대학생들, 그러니까 베이비부머의 자녀들에게 ‘아버지한테 원하는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돈밖에 없다’는 답이 40% 이상 나왔다고 한다. ‘돈 다음에 뭐 있는 거 빼고, 오로지 돈 하나만 원한다’는 학생이 열 명 중 넷이 넘었다고 한다.
베이비부머가 800만명에 달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일터 밖으로, 집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낙향을 하거나 귀농, 귀촌을 하는 이들은 극소수다. 새로 월급을 받는 이도 많지 않다. 연금이 나온다 해도 충분하지 않다. 대부분은 알량한 퇴직금, 혹은 전 재산인 아파트를 담보로 치킨집이나 삼겹살집을 차렸다가 바로 문을 닫기 일쑤다. 이들이 가족이나 이웃, 사회로부터 인정받는다면 사정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들이 자신의 생을 한 편의 이야기로 재구성하고, 이를 통해 경험과 지혜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다면 노인 자신은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가 달라질 것이다. 우리 사회 전체, 모든 세대가 활기를 되찾을 것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다. 노인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탈리아 자율주의자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가 쓴 <미래 이후>를 읽다가 두 눈이 환해지는 구절을 만났다. ‘유럽의 노인 세대는 서구 사회가 부와 자원의 재분배에 관한 오래 지속될 합의에 이르도록 준비시키는 문화혁명의 주체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 베이비부머를 포함한 노년 세대가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은퇴자와 노인들이 건강하고 품위 있는, 그래서 서로 존중하고 존중받는 세상의 주역으로 나서야 한다. 공감하는 노인, 분노하고 연대하는 노인이 정치세력으로 등장해 노인을 위한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왜냐하면 노인을 위한 나라가 곧 모든 세대를 위한 좋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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