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류근일 칼럼 :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향한 5.18로 숙성하라]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평양 김가네 핵무기보다 강하다

배셰태 2024. 10. 12. 20:32

[류근일 칼럼 :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향한 5.18로 숙성하라]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 《평양 김가네 핵무기》보다 강하다
뉴데일리 2024.10.12 류근일 논설고문 / 전 조선일보 주필
https://www.newdaily.co.kr/site/data/html/2024/10/12/2024101200006.html

- 프랑스혁명은 야누스,  천사(자유민주)외 악마(피바다 전체주의)가 혼재
- 러시아혁명, 프랑스혁명 악마성이 출산한 괴물
- 5.18과 4.3의 비극성, 어떻게 발효·숙성시킬 건가
- 한강의 문학 여정은 지금부터가 관건
- 인류 보편 가치 담아 어둠·죽음의 장벽도 뚫어내길

■한강의 충격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를 생각한다.
1980년의 《광주》를 그는 이렇게 그린다.

“이해할 수 없었던 한 가지 일은,
(군인들이 쏜 총을 맞고 죽은 광주 시민들의)
입관을 마친 뒤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사실이었다.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은숙이 누나가 동그란 눈을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한낮에 사람을 때리고 찌르고 총을 쐈잖아. 그렇게 (사살)하라고 그들(신군부)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소녀 한강이 받은 충격이 아마 엄청났던 것 같다.
국가를 상징하는 국군이 자기 나라 어린 소년을 쏴 죽였는데, 그 부모가 관을 태극기로 덮다니?

■ 5.18에 깃든 두 얼굴

이런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한강이 역사상 처음 목격한 건 아니었다.

《프랑스 혁명》 때도, 《러시아 혁명》 때도,
《중국과 한반도 현대사》에서도, 정치범 가족들은 어김없이 그런 경우를 겪었을 법하다.

아들의 관을 덮으면서 어떤 가족들은 “그래도 이 나라는 내 나라”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레닌 같은 극렬 《혁명가 동생》은 “내 형을 죽인 이따위 나라는 내 나라가 아니다”라고 저주했을 것이다.

《광주》의 부모들은, “그래도 이 나라는 내 나라다”라고 생각했던 국민이었다.

필자는, 그 이상은 읽고 싶지 않았다. 왜?

■ 《간단치 않은 논점》의 《되새김질》

한강 자신이 그 논점을 어떻게 다뤄왔는지를
당장 알고 싶지 않았던 때문이다.

필자는 한강이 아직 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이 간단치 않은 논점》을 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충분히 《되새김질》하고, 정리하고,
또 정리하길 바라기에.

한강의 부모 세대급인 필자 자신은 대충 이렇게 정리했다.

“2차 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저항운동)는
국민적 의병투쟁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자유·평등·박애의 본연의 프랑스를 벗어났나?
노(no)! 그것을 《계승》했다.”

“혁명은 프랑스에도 있었고, 러시아에도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자유민주주의》를 벗어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전체주의》로 가버렸다.어느 게 탁월한 귀결이었나?《광주》 민주시민들이 아들의 관을 태극기로 덮은 것은, 이래서 위대한 선택이었다.”

“그렇다.《광주 민주화 운동》 주류는 이거다. 《자유·민주·인권의 대한민국》 재확인, 모든 종류의 《전체주의·권위주의·일당독재》를 거부한 《자유대한민국 정신》 재확인이었다.”

이것을 어떤 《다른 쪽》으로 끌어갈 수 없다.

■《종합(綜合)화의 성숙》있었길

한강이 지금쯤 자신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마무리했는지 확실히는 모르겠다. 다만 동영상 속 그의 품격있는 자태를 보면서 필자는 이렇게 읽었다.

“386~586세대에, 그들의 문화에, 일반적으로는 기대하기 힘든 《종합(綜合)화의 성숙》이 그녀에겐 있었으리라.”

한강의 노벨 문학상 수상. 이는 대한민국의
《경제적 선진화》에 어울리는《높은 문화적 품격》을 세계가 인증한 감격적 사건이었다.

이건 《핵(核)무기》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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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 수상자 선정 한강의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비판한 이동복/류근일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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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학은 진리 여부가 상대적으로 명확하고 지식 내용 범주도 분명하다. 만약, 노벨화학상 수상자라도 그 지식 범주를 넘어서는 행동, 예컨대 황당한 화학 변화를 강변하거나 자료 조작이 있은 경우 그 지식 공동체는 가차없이 그의 지적 만행을 질타한다. 이와는 달리, 평화라는 의미 범주나 예술이란 문화 가치의 경계라는 건 없다.

학문이 아니라 미적 가치의 영역에서 벌어지는 문학상은 애초부터 성취 가치의 정확한 범주 및 성취의 크기가 모호하다. 오히려, 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되는데, 과거 성취에 대한 인정 보다는 미래 인정을 보증해주는 것이 된다. 또, 평화상의 많은 경우, 평화 아니라 전쟁 위협이나 학살에 기여한 자들에게 돌아갔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축하연에서 하이에크는 짧은 연설로 경제학 분야에 노벨상을 신설하는 것에 자신의 의견을 미리 물었다면 자신은 이를 분명 반대했을 것이라고 했다. 경제학은 자연과학과는 달리, 노벨상수상자에게 자신의 지적 경계를 일탈할 위험, 곧 너무 큰 권위를 준다는 이유이다. 노벨상 수상자란 이유로 모든 사회 문제에서 의견을 내고 언론마저 이에 휘둘리는 위험을 경계했다. 오히려 겸허함을 요구하는 일종의 히포크라테스 선서 같은 것을 노벨경제학 수상자에게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엇을 얼마나 성취했는지 의미 경계가 모호한 문학과 평화에 관한 노벨상 수상자의 비행을 통제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노벨(Nobel)의 돈으로 만든 상은 이제 상금을 넘어 신화가 되었다. 올림픽 금메달을 넘어 노벨상도 받는다면 1차 산업사회를 넘어 지식사회에 이른 한국을 증명하는 것이라 기대해 왔다. 그래서 받은 게 평화상과 문학상이라면 열광할 것 없다. 실증 및 과학보다 사변 및 로망에 강했던 한반도 씨족의 우성 유전자 선물쯤이라 여기고 한참 더 가야겠다. 평화와 문학이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다루는 영역 옆에서 마치 과학이 받아야 할 권위와 같은 유형의 권위를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걸음 더 가야 한다. 문학을 오직 문학으로만 보고 싶거든 그리하라. 그런 순수 작가가 누구인지 알려주면 고맙겠다. 하이에크의 예지와 더불어 엄연한 사상 전선 현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농도가 어떠하든 4.3, 5.18을 미학화하는 글이 해외의 노벨이란 화려한 포장지에 싸여 역수입되면 수십년 간 이 사회를 오도한 좌파 노털작가들의 자연사만 기다리던 보수층에겐 새 도전이다. 좌파 진영의 새 상징 자산으로 경계없는 영역에서 활용될 우려쯤은 분명히 하자. 장기 전략이란 게 없고 임기응변으로 집권을 기대하는 무뇌아 우파 진영은 이런 국면에서 취약하다. 그래서 광화문 반문재인 집회와 삼겹살 저녁 후 귀가 중 교보에서 ‘채식주의자’ 책 사 주었지 않았던가. 하이에크 말대로, 우리 모든 삶을 정하는 건 바로 사상의 힘인데도 말이다. 멀리 보며 '육식주의자' 쓸 우파 작가 하나 키우지도 못한 결과가 아프다.

출처: 김행범(부산대 교수) 페이스북 2024.10.11
https://www.facebook.com/share/fuzueFgqPZknxd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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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4/10/12/F26P4X7I4RFZLJWY3XE77H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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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동아시아 페미니스트로서 그 전략적 그 효용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게 유로 센트리즘의 현 주소다. 에코와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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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 문학상이 사악한 이유

리터러쳐라는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치는 것을 말한다. 이를 '문학'이라고 번역한 건 오류지만, 어쨌거나 거기에 세계관이 있다는 점에서는 또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세계를 가지려면 거기에 마땅한 철학이나 사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에는 '명작'이니'땡작'이니 하는 평가는 각자 읽는 자의 것이 된다. 이를 비평에서는 '수용자 지평'이라고 한다. 당연히 그런 문학 작품은 등단이나 공모를 통해 독자들에게 추천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

노벨 문학상이 웃기는 건, 그런 공모나 등단이 아니라 노벨재단이 자기들 보기에 '이 작가 좋네'하며 찍어서 상금을 10억씩 준다는 것이다. 이건 추천이 아니라, 그냥 '너 마음에 든다'하고 후원해 주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작가를 지지한다'는 것이다.이 말은 '우리는 어떤 세계를 지지한다'는 뜻이다. 권위를 이용한 일종의 문화 정치, 문화 권력 행위다.

이런 노벨 문학상은 일종의 '미디어 행위'가 된다. 노벨상 작가 자체가 미디어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사악하다는 거다.

노벨상이 과학과 같은 것에 주는 건 문제가 없다. 어차피 그것이 받을 만한 것인지는 학계에서 검증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벨 평화상이니, 노벨 문학상은 그런 검증이나 추인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래서 '권력적 행위'라는 것이고 '미디어화 행위'라는 것이다. 결국 정치적 행위가 된다.

이런 것은 오히려 다원성을 파괴하는 행위다. 리터러쳐에 대한 평가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다.

출처: 한정석 페이스북 2024.10.12
https://www.facebook.com/share/p/rxDy9E5ysbZbJLo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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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바로 '미디어화'라는 것이다. 이제 한강의 소설들은 문체고 나발이고가 아니라,
그녀의 '메시지'만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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