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권력은 '민중(국민)’이 아니라 ‘주권자의 의지’로부터 나온다

배세태 2016. 11. 27. 18:03

미안하게도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미래한국 2016.11.27 한정석 편집위원/前KBS PD

http://m.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255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우리 헌법 제1조의 이 구절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이 구절은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을 베낀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이 구절을 2차대전 후, 헌법에서 삭제했다.

 

나찌의 전체주의 파시즘이 바로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바이마르 헌법의 이 구절을 反자유, 反민주적으로 이용해서 합법적으로 집권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실을 아는 우리 국민은 없거니와 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는다.

 

‘나찌당’의 뜻은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이다. 나찌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 Socialism)라는 이념으로 노동자를 위한다고 했지만, 정작 사회주의와 노동자들을 탄압했다. 물론 기업가와 자본가들도 탄압했다. 나찌가 인정하고 보호한 국민은 나찌의 이념에 동조하는 자들 뿐이었다. 그것이 전체주의 파시즘의 위선적 얼굴이다. 그러한 위선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은 바로 광장의 군중들이었다. 떼법이 헌법을 이긴 것이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청와대를 둘러싸고 수천의 군중들이 외쳤다. 아마도 그들 대부분은 선량한 시민들일 것이고 자상한 아버지이자 또 자녀들일 것이고 아내이자 딸들일 것이다. 그들은 집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일상의 가정과 직장에서 삶을 살아야하는 자연인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가정의 자연인을 쪼에(Zoe)라고 불렀고 정치공동체, 폴리스(Polis)에 참여하는 시민을 비오스(Bios)라고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과 가족만 아는 자연인 쪼에의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그렇기에 정치공동체에 참여하는 시민, 비오스의 삶이 가치있다면 비오스들은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개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묻게된다.

지금 광장에서 청와대를 포위하고 내란이나 외환의 죄가 아니면 소추되지 않는 대통령을 체포나 구속하라는 이들은 가치있는 삶을 사는 시민, 즉 '비오스'인가 아니면 ‘무지하고 비루한’ 자연인 쪼에들인가.

 

‘박근혜 퇴진’을 넘어 ‘박근혜 구속’을 외치는 광장의 군중들은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고귀하고 영원한 삶’, 즉 폴리스의 시민인 비오스의 정치적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찌의 독일 군중들도 그랬다. 나찌즘과 파시즘에 참여하는 삶도 정치적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정치적 행동이 좋은 것인가’라고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그것이 정치철학이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정치적 생각이 옳다고 믿기에 주장하고 행동한다. 하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그 결과는 종종 ‘의도와는 다른’ 정치적 질서를 만들어 왔다. 우리 역사에서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동학 난’이었다.

 

정치란 ‘적과 동지의 구별’로부터 등장하는 질서라는 독일 헌법학자 칼 슈미트의 지적처럼, 조선말 동학운동은 ‘민심은 천심’을 내세워 '공공의 적'을 상정했다. 바로 민비였다. 한국경제신문의 정규재주필은 ‘민비를 때려잡자’는 동학도들의 혁명이 의도와는 다르게 ‘조선을 때려 잡았다’라고 말한다. 동학난은 외세 배격을 내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일본과 청제국이라는 외세의 개입 질서를 만들었고, 조선은 전쟁의 살육장이 되어버렸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장은 적어도 조선말 동학운동에서는 역사적 진실이 아니었다. 동학운동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역사적 교훈이 있다면 ‘권력은 민중’이 아니라 ‘주권자의 의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 된다. 주권자가 누구인가가 명확하지 않다면 국가의 권력은 다른 주권자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것이 국가와 주권간에 숙명적인 관계다.

 

민중(Volks)을 내세운 독일 나찌의 운명도 결국 주권의 실패로 귀결됐다. 2차대전에서 독일은 패망했고 독일인들이 그토록 환호했던 19세기 통일된 독일은 다시 동독과 서독으로 분열됐다. 독일의 일부는 소련에게 그 주권이 넘어갔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구절이 폐기된 것은 바로 독일인들의 반성에서 나온 것이다. 국민이란 ‘자유의 헌정’에 복종하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자유로 자유를 파괴할 수 없고, 민주로 민주를 파괴할 수 없다’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또 다른 이름인 ‘방어민주주의’의 원칙에 국민도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이 독일 헌법의 제1조를 수정하게 된 이유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박근혜는 하야하라’

이러한 광장의 외침은 모든 국민이 복종해야 하는 헌정 질서와는 관계가 없다.

 

아무리 그 수가 100만을 넘고 폭력이 없는 평화집회라 하더라도, 그러한 외침과 행동은 주권자의 입법명령으로 제정된 헌법 질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주권자란 만장일치로 성립된, 그래서 분할되지 않고 양도되지 않는 ‘총의(總意)적 존재’이지,‘다수적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헌법의 밖에서 헌법의 질서를 파괴하는 정치적 행동을 우리는 ‘내전(Civil War)'이라고 부른다. 내전이 성공하면 혁명이 되고, 실패하면 반란이 된다. 아무리 평화적인 방법의 내전이어도 그것은 혁명이든 반란의 전초가 된다. ‘국민의 뜻’이란 언제나 총의(總意)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다.

 

주권의 최고 의사결정권자인 대통령은 결단을 해야한다.

현재의 상황을 혁명으로 보고 스스로 퇴임할 것인가, 아니면 반란으로 보고 헌정수호를 위해 내전을 결심할 것인가. 그것이 설령 비상대권을 통한 계엄의 선포이든 뭐든 대통령은 결단해야 하는 것이다.

 

통치의 덕은 최선과 차선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악덕과 다른 악덕 그 사이에 존재한다. 용기라는 덕이 '비겁'이라는 악덕과 '만용'이라는 다른 악덕의 사이에 있는 것처럼, 헌정수호의 '공화주의적' 결단 역시 '독재'라는 악덕과 '무정부'라는 다른 악덕의 어딘가 쯤에 놓여있다.

 

주권자는 주권의 예외적 상황에서 결단할 수 있는 자이다.’ 칼 슈미트의 말이다. 이 말이 지금 엄중하게 들리는 것은 주권의 최고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주권의 예외적 상황에서 결단하지 못하면 주권은 다른 주권자들에게 넘어간다는 역사적 법칙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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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기사 참고요]

■지금의 한국, 촛불이 수 백만개라도 민주공화국의 法治를 태울 수 없다
미래한국 2016.11.12 한정석 편집위원/ 前KBS PD
http://blog.daum.net/bstaebst/18960

대통령에게 퇴진하라는 요구가 광장을 메웠다. 그 촛불이 수 만개든, 수 십만개든 심지어 수 백만개라도 민주 공화국의 법치규범은 그런 촛불로 소각되는 것이 아니다.

과거 대한민국에 법치의 근간이 확고하지 못했던 때에는 4.19와 같이 민중들의 의사가 곧 국민의 일반의지, 즉 법의 의사일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그런 나라가 아니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를 광장의 촛불들은 유념해야 한다. 군중은 국민이 아니며, 국민이란 주권자의 개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주권자는 단일하며 개인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개인들의 다수의지가 곧 국민의 일반의지는 아니며, 다수의 의지가 주권자, 국민의 일반의지가 되려면 먼저 그 의지가 보편의 규범성과 정당성안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위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