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지금 20대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달관의 세대'가 아닌 '저항의 세대'

배셰태 2015. 3. 2. 09:00

[김인수 기자의 사람이니까 경영이다]

지금 20대는 달관의 세대가 아닌 저항의 세대

매일경제 2015.02.27(금) 김인수 논설위원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5&no=190113

 

최근 한 주요 언론사에서 우리나라 20세대를 지칭해 `달관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절망적 미래에 대한 헛된 욕망을 버리고, `지금 이 순간` 행복하게 안분지족하며 사는 세대라는 뜻이다. 그래서 정규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승진보다는 일 적은 부서로 가고 싶어하며, 돈은 적게 벌어도 적게 쓰고 잘 놀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내 눈에는 달리 보였다. 기사에서 등장한 사례들 대부분은 달관 세대와는 무관해 보였다. 오히려 잘못된 현실에 저항하는 세대로 읽혔다. 길거리에서 돌을 던지는 것만 저항이 아니다. 사회 주류가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면, 그 또한 저항이다.

 

원래 인간은 `의미`있는 노동을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욕구를 타고 났다. 이를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핵심 요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이 자율을 잃을 때,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찾지 못하는 노동을 하게 되면, 일에서 보람과 기쁨을 느낄 수가 없다. 더 이상 노동은 자아실현의 수단이 될 수가 없다. 이런 상태를 일컬어 사회학자들은 `노동의 소외`라고 했다. (노동의 소외라는 개념은 사회주의 철학자 칼 마르크스가 처음 제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 원인에 대해 잘못된 분석을 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유제산제도 때문에 노동이 소외된다며 사유재산제도를 폐지하자는 `망상`에 가까운 주장을 했다.)

 

해당 기사에 등장하는 몇몇 사례를 들여보자. 내 눈에는 `노동의 소외`에 대한 분명한 저항으로 읽혔다. 그 방법과 강도에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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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오늘날 젊은 세대는 왜 기성 세대보다 노동의 소외에 더욱 강하게 저항하는 것일까? 사실 과거 세대는 소외된 노동을 받아들인 게 사실이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며 묵묵히 상사의 지시에 복종하며 자율 없는 노동도 했다. 더 높은 자리와 더 많은 보수를 얻기 위해 별다른 의미나 가치가 없어 보이는 일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 20대는 이를 거부한다.

 

그 이유는 바로, 더 많은 돈이나 더 높은 자리가 `삶의 의미와 행복`을 가져주지 못한다는 깨달음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실제로 심리학계의 석학인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게 되면, 물질적 풍요는 행복을 증가시키지 못한다고 한다. 과거 세대와 달리,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풍요를 겪은 젊은 세대는 더 많은 돈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성향이 약해졌다.

 

그렇다면 진짜 행복은 어디서 나올까? 칙센트미하이는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진정 행복을 느끼지는 지를 연구했다. 그것은 바로 `몰입(flow)`이었다. 그는 `몰입, 행복으로 가는 비밀`이라는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몰입은 무아지경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분명히 알게 됩니다. (중략) 해야 할 일이 비록 어렵다고 해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시간 관념이 사라지고, 우리 자신을 잊게 됩니다. 우리는 더 큰 무엇인가의 일부가 된 것처럼 느낍니다. 일단 (몰입의) 이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면,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게 됩니다." 몰입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진짜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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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 채플린 주연의 영화 `모던 타임즈"의 한 장면. 분업화된 대량생산 공장에서 발생하는 `노동의 소외"를 풍자한 영화로 손꼽힌다.(출처=위키피디아) 

 

스웨덴 사회학자 롤랜드 폴슨이 말하는 `공허 노동(empty labor)` 개념 역시 소외된 노동에 대한 저항으로 읽을 수 있다. 공허 노동은 업무 시간에 하는 사적 활동을 뜻한다. 업무 시간 중간에 커피도 마시고, 동료와 잡담하며, SNS 활동을 하고, 맛집이나 휴가지 정보를 찾는다. 지식노동자가 컴퓨터 앞에 숨어 공허노동을 하더라도 상사기 이를 찾아내 벌을 가하기란 쉽지 않다. 근로자가 주된 노동에서 소외될수록 공허노동의 비중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제 기업들은 노동의 소외를 해결하는데 적극 나서야 한다. 젊은 세대가 소외된 노동을 거부하고, 조모 씨처럼 아예 회사를 떠나거나, 김 씨처럼 편안한 부서를 찾거나, J 씨처럼 `욕 안 먹을 수준`으로 일을 한다면, 한국 기업의 미래는 어두울 것이다. 직원들에게 자율(A, autonomy)을 주고, 의미 있는 일(R, relatedness)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 능력(C, competence)을 개발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당근이나 채찍으로 젊은 세대를 설득하려고 해봐야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나는 `당근과 채찍은 버려라: ARC 욕구 충족되면 고래도 춤춘다(http://goo.gl/8LTawd)는 글에서 이를 자세히 설명한 바 있다.

 

지식경제에서 성장의 엔진은 혁신과 창조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부도 전국 여러 곳에 창조경제혁신센터를 설립해 이를 지원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노동이 소외되고서는 창조와 혁신이 나올 수가 없다는 것 말이다. 자율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찾아 하는 문화가 아닌, 지시에 복종하며 시키는 일 위주로 해야 하는 문화에서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행동 경제학자 댄 애리얼리는 `우리가 일할 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라는 주제의 TED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과거에는 (분업을 통한 효율화를 강조했던) 아담 스미스가 (노동의 소외를 설파한) 칼 마르크스보다 더 옳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지식경제로 이동했다. 여러분은 여전히 (노동의) 효율성이 (노동의) 의미보다 더욱 중요한가라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그 대답은 `No`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일에 얼마나 노력과 관심, 애정을 들일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로 이동했다. 이제 (노동의 소외를 말한) 칼 마르크스가 (분업을 통한 효율성을 강조한 아담 스미스보다) 더 많은 것을 뜻하게 됐다."

 

오늘날 기업이 진정 창조와 혁신을 원한다면, 그리고 젊은 세대로부터 혁신의 에너지를 끌어내고 싶다면, 그들의 노동을 소외시키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