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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혈액형이야기] 의문과 의문 속에서 해법을 찾다

배셰태 2014. 3. 5. 14:13

 

의문과 의문 속에서 해법을 찾다

 

무지에 도전할 수 있는 강력한 소독약이 우리 시대에 있다. 과학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희망을 주는 주인공이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미신과 옛날의 미신에 완전히 젖어 드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 –버트란트 러셀, 영국의 철학자, 문필가, 정치가-

 

간단하게 보이는 혈액형, 그러나 아주 많은 사람을 살려내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혈액형의 분류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긴 다른 사람의 피가 필요할 정도로 수혈이 다급한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혈액은행 시스템이 잘 돼있다. 이제 혈액형은 심심풀이 땅콩처럼 가볍게 이야기하면서 누구나 동참할 수 있는 소재로 변했다. 아마 ‘수다 소재 1순위’가 해도 과언이 아니다. ABO혈액형은 간단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으로 많은 생명을 구했다.  

 


▲ 사람의 혈액형은 간단하게 보인다. 그러나 20세기 초에서야 발견돼 수많은 인명을 구제했다.  ⓒ위키피디아 


우리는 종종 “새로운 피 수혈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듣는다. 예를 들어 프로스포츠에서 어떤 팀이 수 년간 좋은 성적을 올렸지만 선수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해에 갑자기 성적이 나빠질 때 쓰이는 말이다.

또 더 좋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왜 하필 피에 비교하는 전통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새로운 피를 수혈하여 오래 살아보겠다는 인간의 욕망은 혈액형에 대한 지식이 일천했던 15~16세기에 이미 있었던 일이다.

 

16세기 잉카인들 수혈하고 있었다

수혈이 최근의 관행은 아니다. 16세기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현재 페루의 잉카제국을 침입했을 때 잉카인들은 수혈을 환자들에게 일상적으로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혈은 건강한 사람에게서 채취한 혈액 또는 그 성분을 환자의 혈관 속으로 주입하는 치료법이다. 그러나 당시 잉카인들이 어떤 식으로 수혈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아마 그런 차원이라면 한여름 밤의 열기를 식혀주는 흡혈(흡혈귀)의 역사도 수혈의 역사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흡혈귀의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를 최초의 인류로 꼽는다. 그러나 성경의 모태가 되는 유대 설화에는 이브에 앞서 첫째 아내인 릴리스(Lilith)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자유분방해 다른 남자를 좋아하는 바람둥이였고, 그러면서 질투도 많았다고 한다. 결국 신의 노여움을 받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녀는 원한에 사무쳐 황야를 헤매면서 특히 어린아이의 신선한 피를 빨아 먹는 흡혈귀가 됐다. 흡혈귀만 되지 않았다면 아마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기록되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16세기 접어들면서 유럽의 의사들도 건강한 사람들로부터 뽑은 피를 환자에게 수혈하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수혈은 환자를 살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나쁘다고 생각되는)피를 체외로 방출하고(放血), 다시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것은 환자치료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수혈 받은 환자들 대부분 죽어, 그러나 비밀을 밝혀내지 못해

미국 워싱턴 대통령은 방혈로 목숨을 잃은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1799년 워싱턴 대통령은 어느 날 감기로 인해 후두염을 앓게 되었다. 최신 치료법이라고 하는 방혈을 하는 도중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숨졌다. 그런데 이야기는 부풀려져 워싱턴은 피에 대해 미신을 믿는 의사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파다하게 전해온다. 피 속의 더러운 악령을 쫓아내기 위해 방혈이라는 의식을 행하다 출혈이 너무 많아 죽었다는 이야기다.  

 

어쨌든 결과는 대부분 처참했다. 상당수의 수혈을 받은 환자들이 심한 고열로 통증을 호소하다가 바로 죽었다. 의사들은 어렴풋이나마 한 사람의 피가 다른 사람의 피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혈로 건강을 회복한 환자도 있었다. 의사들은 사람들은 피를 모아 섞어보는 실험을 여러 차례 진행했다. 그러나 그 섞인 피들은 끈적끈적한 덩어리로 변했으며, 결국에는 완전히 응어리가 돼버렸다. 그 이후 100여 년 동안 의사들 사이에 수혈하는 관행은 사라졌다. 수혈을 통한 환자치료는 완전히 잊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질병치료에서 수혈에 대한 생각이 거의 잊혀질 무렵 혜성같이 나타난 영웅이 있었다. 바로 오늘날의 ABO식 혈액형을 발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의학자 카를 란트슈타이너(1868~1943)다.

 

의사활동 잠시 접고 혈액연구에 몰두    
그가 외과의사로 근무하면서 혈청학과 면역학을 공부할 때만 해도 수술환자의 반은 죽어나갔다. 의사가 아무리 집도를 잘 해도 마지막으로 수혈이라는 과정이 남는다. 그러나 혈액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수술과정에도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피가 부족해 숨져가는 환자들을 자주 목격했다. 거기에서 그는 커다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 ABO 혈액형을 발견한 카를 란트슈타이너. 이 공로로 193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위키피디아   

 

“다른 사람의 피가 환자의 피를 대신한다면 여러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그 방법이 과연 없는 걸까?”  

“왜 다른 사람의 피는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또 다른 사람의 피와 화합할 수가 없는 걸까? 극소수는 왜 탈이 없는 걸까? 사람의 피는 어떤 특별한 성질이 있어서 어울릴 수도 있고,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있는 게 아닐까?” 

 

그의 의문은 다시 이어졌다.  

“특별한 성질 때문에 어울리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다고 일단 가정해 보자. 그러면 특별한 성질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만 알아낸다면 같은 성질의 피를 갖고 있는 사람들 간에 피의 교환은 문제가 없을 꺼야!” 

 

란트슈타이너는 결국 의사활동을 잠시 접고 모교인 비엔나 대학 위생연구소에서 혈액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9001년 이러한 혈액응고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끈질긴 집념을 불태운 그는 결국 1년 만에 그 해답을 내놓을 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피와 그리고 많은 동료들의 피 샘플들을 수집했다. 그리고 샘플을 다른 샘플과 섞어 과연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수백 차례에 달하는 혼합실험을 실시하면서 혈액연구에만 매달렸다. 그의 거대한 의문과 끈질긴 연구의 결과가 결실을 맺은 것이다.

 

본래 C형인데 ‘응고반응 제로’라는 의미에서 O형으로 개칭

결국 피는 ABC(A형, B형, C형) 세가지 형태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C형은 나중에 O형으로 다시 바뀌었다. 그러면 왜 O형으로 바꿨을까? 신기하게도 다른 혈액형을 만나도 굳어지는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고반응 제로’라는 의미에서 C형을 O형으로 바꾼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O형을 ‘남성다운 혈액형’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말 남성다운 혈액형인지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바가 없다.  

 

사람의 혈액형을 셋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발표된 그 다음해인 1902년 소위 ‘깍쟁이’ 혈액형 AB형이 다시 발견되었다. 역시 신기한 이 혈액형은 줄 줄은 모르고 받기만 한다는 점이다. 이로써 ABO식 혈액형 체계가 완성된 것이다.

이후 ABO식 분류법은 수많은 환자들을 죽음에서 해방시켰다. 또한 1904년 혈액을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혈액저장창고 시스템의 개발로 혈액부족으로 환자가 사망하는 케이스는 아주 줄어들었다. 특히 이후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병사들을 죽음에서 구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의 공포와 미신’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다.

'피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길다. 피가 인체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뽑아내 바르기도 했고 먹기도 했다. 특히 고대시대에는 전쟁포로를 죽여 그들의 피를 마시기도 했다. 산채로 제사를 지낸 후 이러한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인간은 피에 대해 공포를 느끼는가 하면 깊은 미신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버트란트 러셀의 지적처럼 란트슈타이너는 ABO식 혈액형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으로부터 그러한 미신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공포로부터 해방시킬 수가 있었다.

1868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명한 기자이며 신문 편집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비록 여섯 살 때 법학을 공부했던 아버지를 잃었지만 집안은 어느 정도 넉넉해 의학을 공부했고, 성이 다 차지 않아 다시 화학도 공부했다.

그는 졸업 후 모교인 빈 의과대학의 조교로 일하면서 수술과 같은 외과의학보다 혈액 연구에 매달렸다. 의학의 주류에서 벗어나 혈액과 혈청연구와 같은 임상의학에 일생을 보내게 된 것은 화학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에 대한 애착심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혈액형, 성격이나 우수성과는 전혀 관계 없어


 

  

▲ 수혈의 역사는 길다. 그러나 잔인했으며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한 환자가 양으로부터 수혈하는 모습으로 1705년대 그림이다.  ⓒ위키피디아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혈액형과 성격과의 관계는 과연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한마디로 말해 혈액형과 성격과 관련 과학적인 근거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지 않고 있으나 우리나라와 일본 사람들이 혈액형과 성격의 연관성을 믿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욱 심하다. 일부 외국 사이트를 들여다 보면, 한국에서 대학생들을 비롯해 젊은 층과 어울리기 위해서는 혈액형에 대해서 알고 가야 한다는 내용들을 쉽게 읽을 수 있다. 그래야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충고까지 있다.  

 

인종의 우월성을 다루는 우생학에 이용한 경우도 있다. 다윈과 골턴, 멜더스 이후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우생학이 유행하고 있었다. 주로 백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학문적으로 입증하려 한 것들이었다. ABO식 혈액형 지식이 도입되자 1910년대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폰 둥게른(Emile von Dungern) 박사는 ‘혈액형의 인류학’이라는 논문에서 혈액형에 따른 인종 우열 이론을 폈다.

 

백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려는 우생학에 이용되기도

더러워지지 않은 순수 유럽민족, 즉 게르만민족의 피가 A형이고 B형은 검은 머리, 검은 눈동자의 아시아 인종에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A형이 우수하고 B형은 뒤떨어지며, 따라서 B형이 비교적 많은 아시아인들은 원래 뒤떨어진 인종이라는 주장이었다.

1916년 독일로 유학을 갔다 온 일본인 의사 키마타 하라는 혈액형과 성격을 연결시키려는 조사 논문을 발표했다. 1925년경부터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병사들의 혈액형을 기록하기 시작하였고, 그 정보가 그들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하는 데 유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때 이력서에 혈액형을 표시하는 난이 생겼다.  

 

1937년 외무성 관련 업무를 하던 한 의사는 O형인 사람이 더 훌륭한 외교관이 될 수 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까지도 혈액형을 표시하는 난이 남아 있는 이력서 서식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 이러한 이론은 여성지 등을 중심으로 궁합문제, 직업문제, 대인관계, 학습법 등으로 응용되고 온갖 파생 상품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80년대에 들어와 그 붐이 가라앉긴 했지만, 현재도 많은 관련 잡지와 책 등이 출판되고 있다. 현대식 점술가들도 이용하고 있다.  

 

ABO혈액형은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수혈 가능의 여부를 알기 위한 수단이다. 혈액형이라는 네 가지 분류만으로 인간 비밀이 담겨 있다는 인간게놈을 따라잡을 수가 있을까? 장님의 코끼리 만지기보다도 못한 일이다.
 
김형근 객원기자 |  hgkim54@naver.com
저작권자 2014.03.04 ⓒ Science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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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미래창조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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