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뒷편, 이기심이 사회를 발전시킨다

배세태 2013. 10. 8. 16:40

 

"우리가 빵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빵집 주인의 이타심이 아니라 빵집 주인의 이기심 덕택이다." 영국 글래스대학의 한 교수는 당대의 상식을 뒤집어엎은 도발적인 발언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가르침을 믿고 따르던 시절에, 이 학자는 "이기심은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니 이 이기심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라"라고 공언했던 것입니다.

 

이웃의 물건을 훔치는커녕 물건을 훔치고 싶은 욕망만 품어도 죄악을 지었다고 고해성사를 했던 그 시절에 남의 것을 빼앗건 말건, 사기를 치건 말건, 도둑질을 하건 말건 욕심껏 재물을 모으는 일이 결코 사회의 발전에 해롭지 않다고 발표하다니, 경쟁만 보장된다면, 또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지기만 한다면, 개인의 이기심에 따른 행위들은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낸다고 그는 주장했던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의해 개인의 이기심과 경쟁이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만들어낸다는 것일까요?

 

"공익을 추구하려는 의도도 없고 자신이 공익에 이바지하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은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 그런데 그들은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은 부수적 결실(공익)을 얻게 된다."

 

학자의 이름은 애덤 스미스. 이 '보이지 않는 손' 이 등장하는 책의 이름은《국부론》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 부리는 마술에 속아오지는 않았을까요? 사물의 인간관계를 밝혀야 하는 논리적인 글에서 원인의 제공자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든가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힘 따위로 얼버무리는 것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고서 모든 것을 다 설명했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신비주의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스미스가 주장하고 싶었던 바는 이른바 '레세페르' 입니다. 프랑스어의 'Laissez' 는 영어의 'Let' 에 해당되고 'faire' 는 'do' 에 해당하는 말이니 이를 우리말로 바꿔보면 '하도록 내버려두라' 는 정도입이다. 비틀즈가 불렀던 'Let it be' 와 같은 말이 바로 '레세페르' 인 것입니다

 

스미스가《국부론》을 집필하던 1776년은 대서양 건너 미국에서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부수는 투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스미스가 영국에서 펜대를 쥐고 중상주의와 싸우고 있었다면 워싱턴은 미국에서 총을 쥐고 중상주의와 싸우고 있었습니다.식민지 주민들이 영국과 싸워 이기리라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당시 상황에서, 워싱턴의 민병대는 영국의 정규군을 물리치고 독립선언문의 정당함을 확인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국왕이 나라 경제의 구석구석까지 관여해 제한을 가하던 당시 상황에서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는 중상주의를 물리치고 해일처럼 밀려드는 산업혁명의 이념적 토대를 세웠습니다.

 

《국부론》은 900페이지가 넘는 지면에 방대한 역사적 • 지리적 자료들을 담고 있으나, 전개되는 경제이론은 단순합니다. 스미스는 책의 서문에서 한 국민의 연간 노동은 그 국민이 소비하는 생활필수품과 편의품 모두를 공급하는 원천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상품 가치의 원천이 노동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국가의 부는 농업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생산자, 노동자들의 노동에 달려 있다는 사상을 시사한 것입니다.

 

스미스가 왜 이런 명제를 서문의 서두에 밝히게 됐는지, 우리는 이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끊임없이 국가의 부를 증대시키려면 금이나 은과 같은 화폐를 많이 축적해야 한다는 중상주의에 대한 대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경제학사에서는 스미스를 메뉴펙처(공장제 수공업) 시대를 대변하는 경제학자라 하여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자본주의 시대의 경제학자들과 구별합니다.

 

사실 오늘날의 경제학 지식에 의하면 스미스의 논리는 매우 소박한 것이며, 더러는 오류인 대목들도 있습니다. 경쟁의 자유만 주어지면 경제는 합리적으로 운용될 것으로 이야기한 점이나, 다른 모든 상품은 자유로운 경쟁에 의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은 사실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노동자가 제공하는 노동력이라는 상품만큼은 자본가와 자유로운 경쟁을 할 수가 없습니다. 19세기 자본주의 역사는 스미스의 주장대로 자유방임주의의 길을 걸었으나, 그 시대에 노동자 계급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단테가《신곡》에서 묘사한 지옥의 고통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자유방임주의는 산업혁명을 전후로 브로주아 계급이 절대 군주와 영주 독점 상인들과 싸우기 위해 치켜든 깃발에 불과했음을 이후의 역사는 증명합니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유럽의 자본주의는 격심한 공황을 주기적으로 겪어야 했고 이 과정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배제하는 독점자본의 출현, 자유경쟁자본주의는 독점자본주의로 변신했습니다. 하지만 사회를 경제적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인식이 바로 스미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