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선우정 칼럼] 잔인한 승리자, 비루한 패배자

배세태 2022. 3. 30. 17:24

[선우정 칼럼] 잔인한 승리자, 비루한 패배자
조선일보 2022.03.30 선우정 논설위원
https://www.chosun.com/people/son-u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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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 대통령 부인의 옷과 장신구가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 많은 의상을 어떻게 조달했는가 하는 의문이다. (왼쪽부터) 2017년 조안 허버드 전 주한 미국 대사 부인이 김 여사의 분홍색 누비옷을 살펴보는 모습. 2018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부인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입장하는 모습./연합뉴스

요즘 화제는 문재인 대통령 부인의 화려한 옷과 장신구 이야기다. 하루에도 몇 차례 부인 사진과 패러디물이 소셜미디어에 올라온다. 예전에 공개된 사진인데도 화제를 모으는 게 신기하다. 문제가 커지자 청와대는 “임기 중 대통령 부인의 의류비는 사비로 샀다”고 했다.

대통령 부인은 잘 입어야 한다. 태가 안 날수록 좋은 옷으로 받쳐줘야 한다. 정상 외교 때 나라의 위신에 맞는 품격을 갖춰야 하는 것이다. 온라인에 노출된 문 대통령 부인의 옷과 장신구는 웬만한 스타들 이상이다. 그 많은 사비를 지불했다는데 대통령 재산에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청와대는 지출 내역을 “공개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특활비는 국가 기밀, 사비는 개인 영역에 숨겼다. 입 닥치고 믿으라고 한다. 사비로 샀다면 탓할 일이 아닌데 왜 끝까지 감추려 하나.

문 지지자들의 공격은 예상대로다. 물러나는 대통령에 대한 특정 세력의 집단 가해가 시작됐다고 한다. 장년 여성의 외모에 대한 불순한 조롱이라는 시선도 있다. 그런 의도를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가 화제가 된 것은 법원이 청와대에 대통령 부인의 옷과 장신구 구입 내역을 공개하라고 판결한 이후다. 그때도 큰 화제는 아니었다. 상식적인 판결이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국가 안보에 관한 사항”이라며 불복하고 항소한 뒤, 정확히 말하면 항소로 인해 이 문제가 미궁 속에 장기간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진 다음부터 이슈가 커졌다. 특정 세력의 공세가 아니라 청와대의 구차한 대응이 만든 이슈다.

김어준씨는 이 논란을 “논두렁 시계2 간보기”라고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고간 수사의 신호탄 같은 의심이 든다는 것이다. 이들은 ‘논두렁 시계’를 누명처럼 말한다. 워낙 자주 들먹여서 많은 사람이 시계 자체가 없었다고 여긴다. 하지만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보도에 근거가 없었다는 것일 뿐, 노 전 대통령 부인이 재벌 회장에게 개당 1억원짜리 명품 시계 2개를 받았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유시민씨는 “노 전 대통령이 망치로 깨버렸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논두렁 투척’보다 심한 증거 인멸이다. 일가는 거액의 외화도 받았다. 5년 전처럼 수사하고 판결했다면 봉하마을이 성지가 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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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박수현 대변인이 2017년 7월14일 오후 청와대 춘추관에서 과거 정부 민정수석실 자료를 캐비닛에서 발견했다고 밝히며 박근혜 청와대가 생산한 문건들을 공개했다.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생방송으로 폭로했다.

문 지지자가 주장하는 집단 가해와 불순한 조롱이란 이런 것이다. 5년 전 문 대통령의 청와대 생활은 전임자에 대한 인격 살인에서 시작했다. 첫 공격이 소위 ‘청와대 거울방’이다. “거울이 사방에 붙어있는 방을 수리하느라 대통령의 청와대 입주가 늦어졌다”는 얘기가 여권에서 나왔다. 논두렁 시계는 실체가 있었지만 거울방은 실체가 없다. 사치, 나태, 무능을 떠올리게 하려는 불순한 거짓이다.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침대를 두고 가 처리 곤란하다는 얘기도 나왔다. 전임자의 캐비닛까지 뒤져 내용물을 공개했다. 청와대 대변인이 자청해 기자회견을 생중계했다. 용서도, 금도도 없다. 밟고 또 밟았다.

이런 청와대가 지금 외부의 공개 요구에 맞서 대통령 부인의 옷장과 패물함을 사수하기 위해 법정 투쟁을 불사하고 있다. 물러나는 마지막 날까지 꾸역꾸역 챙겨 나가겠다고 기를 쓰는 것이다. 지금 청와대 땅에 살던 마지막 조선총독의 피난선이 패전 직후 몰래 일본으로 출항했다. 하지만 탐욕스럽게 쌓아올린 총독 아내의 재물 때문에 배가 기울어져 부산 앞바다에 집단 수장될 뻔한 일이 있다. 이 촌극을 떠올리게 한다.

물러날 때 처신의 중요성을 문 대통령을 보면서 깨닫는다. 대통령 재임 60개월 중 마지막 두 달은 깨끗이 비우고 권력을 미래와 나누라고 준 시간이다. 그런데 대통령 부인의 옷과 장신구를 장롱에 그득하게 쌓아놓고, 충성한 자기 식솔을 위해 최후의 한 자리까지 챙기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정치 원로들도 이런 광경을 처음 본다고 한다. 권력과 인간의 밑바닥을 보는 듯하다. 승리했을 때 잔인할수록 패배했을 때 비루해진다.

사람들은 언젠가 물러난다. 영광스러운 퇴진은 드물다. 대부분 밀려서 나간다. 허무하고 때론 분노한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도 필요한 자료를 챙겨 후임에게 넘겨주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해 자신의 흔적을 없애려고 노력한다. 변두리 가게의 망한 점주조차 감사와 사과 문구를 적어 폐업 안내문을 붙인다. 남을 원망하는 글을 본 일이 없다. 사회적 도리이기 때문이다. 퇴장하는 순간까지 긍지를 지키고 싶은 것이다. 하물며 물러나는 대통령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도연명의 시에 나오는 ‘응진편수진(應盡便須盡)’이란 말을 좋아한다. 넓게 풀이하면, 물러날 때일수록 깨끗이 처신하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