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김용삼 칼럼] 문재인 대통령이 급칭송한 김원봉에 대해 알아보자■■

배세태 2019. 6. 7. 16:17

[김용삼 칼럼] 대통령 문재인이 급칭송한 김원봉에 대해 알아보자

펜앤드마이크 2019.06.07 김용삼 대기자

http://www.pennmike.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14

 

코민테른 자금 받아 의열단 활동, 중국 정부 지원받아 조선의용대 조직, 의용대에서 왕따 당한 후 임시정부와 손잡고 광복군 부사령관, 해방 후엔 좌우합작운동을 펼쳤던 폭력·암살·파괴 독립운동의 대부(代父). 1948년 남북협상 위해 월북했다가 북에 정착하여 노동상, 국가검열상을 역임하며 이승만 노선의 대척점에 서 있었던 인물이 김원봉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인물을 지속적으로 띄워야 하는 무슨 특별한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먼저 현충일 기념사 이야기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대한민국 대통령 문재인은 다른 날도 아닌 6월 6일 현충일 기념사에서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광복군이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뿌리가 되었다고 급칭송했다. 대체 김원봉이 누구이기에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잠든 국립현충원에서, 그 분들의 희생을 기리는 날을 골라 칭송을 했을까?

 

이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는 김원봉이 해방 공간에서 월북하여 북한 탄생에 일조했고, 북한을 위해 일했다는 원죄를 바탕으로 그의 활동을 싸잡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가 택했던 그 길과 방법론이 과연 이 민족, 이 국가가 나가는 장도(壯途)에 있어 올바른 방향이었는지를 따져보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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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 자금 지원받아 의열단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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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우리 혁명의 대본영,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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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의 생가터인 밀양에 '의열기념관'이 작년 3월 7일 문을 열었다.(사진 연합뉴스 제공)

 

이 무렵 이승만은 의열단이 추구했던 암살·파괴·폭력투쟁 방식에 대해 가혹한 비판을 제기했다. 그가 투항주의자이고 개량주의자 내지 일제 통치 협조자여서가 아니다. 이승만이 무장투쟁이나 의거와 같은 유혈 봉기에 거부감을 가지게 된 이유는 미국 유학 시절인 1908년과 1909년에 발생한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문이다. 이승만의 자서전에서 당시 상황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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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환·전명운 두 의사의 스티븐스 암살은 미국 내에 혐한(嫌韓)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여파로 이승만은 하버드대 대학원 담당교수로부터 면담은 물론 논문심사까지 거절당했다. 한국인들 입장에서는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당한 의거라도 미국 언론이나 시민들의 눈에는 ‘암살자는 흉악한 악당’ 식으로 해석되는 것을 보면서 폭력을 동원한 독립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정당화해 줄 뿐이라는 교훈을 얻었던 것이다.

 

칸트는 『영구평화론』에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꼭 해야 할 세 가지와, 하지 말아야 할 일 6가지를 꼽았다. 하지 말아야 할 내용 중 여섯 번째 항목이 “어떠한 국가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 동안에 장래의 평화 시기에 상호 신뢰를 불가능하게 할 것이 틀림없는 다음과 같은 적대 행위, 암살자나 독살자의 고용, 항복 조약의 파기, 적국에서의 반역 선동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이다.

 

무기 들고 투쟁보다 국제법 공부가 더 중요

 

칸트의 영구평화론 제6조에 의거하여 이승만은 암살이나 테러, 파괴공작이 독립을 가져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스티븐스 사건이 발생한 후 이승만은 의병 활동에 비판적인 글을 1905년에 창간된 재미동포단체 신문인 『공립신보』에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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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외교독립론을 주창한 또 한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일본은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열강으로 발돋움하여 동아시아에서 대적할 상대가 없는 강국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일본의 판도는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 동쪽의 시베리아 지역에서부터 북만주 일대, 중국에서는 산동과 화중(華中)지역 양자강 일대, 남쪽으로는 태평양의 남양군도까지 광활한 지역을 장악했다.

 

그전까지 전 세계를 호령하던 서양 열강들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전승국이나 패전국을 가릴 것 없이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에서는 공산 혁명이 일어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다. 따라서 동아시아 전역으로 뻗어나가는 일본을 억제하거나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정부가 조직한 부대

 

열강으로 급부상한 일본은 산업력이나 군사력에서 다른 서양 열강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일본은 해군력 확장에 전력을 기울여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과 비슷한 수준에 올랐다. 급기야 1922년 워싱턴에서 군축회의를 열어 일본의 해군력 확장을 제한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처럼 강력한 일본을 상대로 김원봉의 의열단이나 박용만, 노백린 등이 구상한 수백 명 규모의 빈약한 무장을 한 군대가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벌일 경우 얼마나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까? 더구나 한국의 독립군은 체코 군단처럼 국제적 지원이나 관심도 끌지 못했다. 숭고한 이상은 현실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빛나는 법인데, 우리의 무장 독립운동은 이상은 원대했으나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다.

 

1938년 10월 10일 김원봉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조선의용대도 심각하게 따져봐야 할 점이 너무나 많다. 이 부대는 중국 정부의 정치부가 관할하는 조건으로 조선의용대의 창설을 승인했다.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중국 정부가 김원봉에게 의용대를 창설하라고 하여 부대가 만들어지자 김원봉을 대장에 임명한 것이다.

 

중국 정부 산하에 소속되어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매월 식비 20원과 공작비 10원씩을 지급받았다. 이런 한계 때문에 아무리 이 부대를 미화찬양해도 국민당 정부군 산하의 지원부대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다. 인원도 약 100여 명으로 출발하여 1940년대에는 최대 314명까지 늘어났다. 무장한 군대도 아니어서 주로 포로 심문과 일본군에 대한 비라 살포 등 반전(反戰)활동이 고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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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군이 광복군 지휘권 행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유지 운영할 재정적 여력이 없었다. 그 결과 1941년 11월 19일 임정은 중국 정부와 협상 끝에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훈련과 무기·장비·급여 및 경비 일체를 지원받는 조건으로 광복군의 모든 행정과 작전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를 받는 것을 수락했다.

 

즉 광복군의 활동자금을 지원받는 대가로 지휘권을 중국군 참모총장에게 넘긴 것이다. 그 결과 광복군 지휘부의 모든 요직은 중국군 장교에게 넘어갔다. 김삼웅은 광복군의 상황에 대해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비록 중국군의 명령과 지휘감독을 받을지언정 일본군을 격멸하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항일전에 나서는 것만이 민족적 대의(大義)였다는 것이다.

 

좌익·공산전체주의자들은 지금도 이승만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넘긴 것을 “자주권의 포기”니 뭐니 하며 극악무도한 언어를 동원하여 비판한다. 그렇다면 의아한 것이 있다. 광복군의 작전지휘권을 중국군에게 넘긴 것은 민족적 대의라고 미화찬양하면서, 6·25 남침전쟁이 벌어졌을 때 한국군이 유엔군의 일원이 되어 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에게 위임한 이승만의 행위가 그토록 비난받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채호가 ‘의열단 선언’에서 그토록 열망했던 양병 10만도 환상의 목표에 불과했다.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초 일본은 중국대륙, 태평양에서 미국·중국·영국 등 연합국과 싸우느라 720만 대군과 항공모함·전함·전투기·폭격기·전차 등 최신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광복군은 출범 당시 창립 1년 후 최소 3개 사단 편성을 목표로 삼았다. 거창했던 창군 당시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1945년 4월 광복군의 규모는 541명(중국인 장교 65명), 종전 시점에도 682명에 불과했다. 682명이든 6820명이든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에 대한 명목상의 통수권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작전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견도 낼 수 없는 고단한 처지였다.

 

이러한 광복군을 대통령 문재인은 국군의 뿌리이자 모체라고 선언했고, 소련공산당의 자금을 받아 의열단 활동을 했고, 중국 정부 자금을 받아 활동했던 조선의용대를 칭송했다. 그가 참여한 광복군이 국군 창설의 뿌리라고 언급했다. 아나키스트 테러리즘, 중국 정부 산하의 조선의용대, 광복군 통수권 및 지휘권은 중국군 보유로 점철된 존재를 '국군의 모태'라 한다면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는 중국군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뜻인가?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인데, 그 분 지금 제 정신인가?

 

..이하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