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스크랩] 대통령의 탄핵과 광해군,

배세태 2017. 1. 30. 20:01

올해 설날 연휴를 맞이하여 시골에서 만난 친척과 지인들의 화제는 단연코 대통령 탄핵이 기각될 것인지, 아니면 인용될 것인지 여부와 차기 대선에 과연 누가 정권을 잡을 것인지에 관한 화제가 주류를 이루었을 정도로 민심은 요동치고 있었다. 대통령 단핵이란 미중유의 사태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것이 조선시대 제 15대 임금 광해군 이었다. 조선 왕 중에서 스스로 폭정을 일삼다가 쫓겨난 연산군 같은 왕도 있지만 외교노선이 빌미의 단초가 되어 쫓겨난 광해군 같은 왕도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광해군의 재임기간은 1608년에서 1623년까지였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16세기 중반, 한반도 주변의 국세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신흥국가로 성장하여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세워 조선에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전통적으로 선린관계를 맺어 왔던 명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후라 일본의 동향에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을 정도로 한반도 주변의 상황은 심각했다. 그 당시 명()나라와 후금(後金) 사이에 전쟁이 발생하여 명나라에서 원군요청이 왔다. 전통적 우방이었던 명나라의 원군 요청을 거절하지 못한 광해군은 실리적인 외교 전술을 펴기 시작한다.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과의 전쟁에서 명나라가 불리함을 간파하고 강홍립에게 1만의 병사를 주어 파견시키되, 상황을 봐서 의도적으로 후금에 투항하게 함으로서 명나라에게는 명분을 주고 후금에는 실리를 택하는 능란한 중립적인 등거리 외교솜씨를 발휘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국력이 약한 나라일수록 외교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왕이었기에 국제정세를 살피는 안목이 있었고, 이에 적절한 외교를 할 줄 아는 왕이었기에 선택 가능한 외교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국내 정치가 문제였다. 정치권은 사림(士林)세력이 장악하면서 붕당을 결성했고, 조정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하루해가 무섭게 정쟁을 일삼다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누어졌고, 북인은 또 대북과 소북으로 나누어지는 등 끝없는 당파싸움에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고 왕권 역시 절대적인 권위를 회복할 수가 없었다. 마치 최근의 국내 정치권과 매우 유사했다.  당시 조정을 지배하고 있었던 사림 세력은 정권의 이념으로 성리학적 윤리관에 기초하고 있었던 탓에 국제정세를 보는 안목은 백치수준이었다.

 

따라서 광해군이 펴고 있는 등거리 중립외교는 성리학적 윤리관에 밀려 비판을 받았으며, 중립외교로 후금(後金)과 평화관계를 유지한 것도 사림 세력에게 있어서는 명나라에 대한 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굴욕적인 행위라고 거센 정치공세에 시달리기도 했다. 광해군은 전쟁을 현장에서 직접 겪은 탓에 그 전쟁의 참화로 인해 피난지에서 왕세자가 되었고 선조의 엄청난 견제를 뚫고 왕위에 올라 국력이 약한 나라가 살아갈 길은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로 풀어나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터득하여 중립외교를 펼치며 조선이 살아 갈 길을 모색한 뛰어난 임금이었으나 서인과 북인 사이에 벌어진 정치적 이념의 갈등과 붕당이 일으킨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희생된 불운한 왕이기도 했다.

 

광해군은 사림 세력의 정치공세에 벗어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계축옥사를 일으켜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제거하고 뒤이어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정치적인 승부수를 띄웠으나 반대파의 정치공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서인세력이 주동하여 일으킨 인조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고 광해군 가족은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니 그때가 1623년 이었다. 광해군은 전쟁을 직접 겪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나라의 군사력 증강이 절실함을 깨닫고 병기를 정비하고 군적을 정리하기 위해 호패법을 도입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피폐해진 전쟁의 상흔(傷痕)을 수습하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의보감 편찬을 비롯하여 각종 서적과 문헌을 정리하는 등, 내치에도 상당한 업적을 쌓았지만 결국 반정(反正)의 희생물이 되어 승자의 역사 지배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임금이 죽은 후, 종묘(宗廟)에 신위(神位)를 모실 때 붙이는 호(). 즉 묘호도 받지 못해 아직까지도 조()나 종()이 아닌 으로 불러지고 있다. 이처럼 재임 중 많은 업적을 쌓은 왕이라고 해도 왕을 반대하는 정치세력이 인위적으로 죄를 엮어 버리면 한순간에 폐위가 되는 것을 광해군의 실례(實例)가 보여주고 있다. 탄핵 중인 박 대통령은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맞이하여 국민에게 명절인사조차도 건네지 못했다. 가슴이 몹시 저미고 쓰라렸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보수정부에 걸 맞는 정책을 추진해 왔고 실제 많은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이 업적을 무산시키기 위해 불순한 세력이 일으킨 기획 작품일 가능성이 매우 높으므로 이 음모를 반드시 분쇄하여 대통령의 업적을 지켜야 한다. 국민이 태극기를 들고 일어나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앞으로 쓰여질 역사에 정치적 기획 음모에 의해 희생된 광해군 같은 대통령이 있어서는 절대 안 될 일이기 때문이다.

 

 

 


출처 : 호국미래논단
글쓴이 : 장자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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