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사람만이 희망이다] 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을 위한 변론

배셰태 2016. 6. 17. 00:29

[정동에서]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을 위한 변론

경향신문 2016.06.14 박구재 기획·문화에디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6142049005&code=99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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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ILO)가 1928년 조약으로 채택한 이후 최저임금제는 전 세계 120여개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시행되고 있다. 

최저임금제가 도입된 지 100년이 넘었지만 논쟁의 중심에서 비켜난 적은 거의 없었다. 시비를 거는 쪽은 고용주와 시장만능주의에 매몰된 경제학자들이었다. 그들의 논리는 단순했다. 저임금 노동자를 돕기 위한 최저임금이 되레 실업을 유발하는 칼날로 되돌아올 것이란 얘기다. ‘공공선택이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뷰캐넌은 최저임금 옹호자를 ‘매춘부’에 비유하며 힐난했다. ‘시카고학파의 대부’로 불린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게리 베커도 “정치인이 마법사가 아닌 다음에야 최저임금제를 도입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최저임금은 노동시장을 교란시키지 않았다. 임금이 오른 만큼 노동자들의 생산이 증가하니 기업 입장에선 손해 볼 것도, 일자리를 줄일 이유도 없었다. 저임금과 낮은 생산성이란 악순환의 고리를 최저임금제가 끊은 셈이다.


지난주 스위스에서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내용을 헌법에 담을지를 묻는 국민투표가 치러졌다. 아직까지 국민투표로 기본소득 도입 여부를 결정한 사례가 없었기에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76.9%의 반대로 부결되긴 했지만 스위스의 기본소득은 최저임금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상당한 파장과 논쟁을 불렀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착취를 막기 위한 최저임금과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매달 일정액을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대척점에 서 있는 제도로 간주될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생계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라는 근본 취지는 같다. 스위스의 국민투표는 헌법에 기본소득 개념을 명시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기본소득 금액과 재원조달 방안은 법률로 정하기로 돼 있었다. “성인에겐 매달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원), 18세 이하 미성년자에겐 650스위스프랑(약 78만원)을 지급한다”는 것은 헌법 개정안 발의를 추진한 ‘기본소득스위스(BIS)’가 제시한 하나의 안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쟁은 부자 나라의 ‘퍼주기식 복지 포퓰리즘’에 방점이 찍혔다. 기본소득 도입 취지보다는 ‘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매달 300만원 지급’만 부각된 탓이다. 스위스에서 300만원은 최저생계비(2219스위스프랑·약 268만원)를 약간 웃도는 수준인데도 ‘기본소득=나라 재정을 파탄 낼 제도’라는 선입견을 갖게 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뱀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주기 위해 개구리를 더 살찌우는 꼴”(파이낸셜타임스), “기본소득은 중앙은행이 시중에 뿌리는 ‘헬리콥터 머니’”(월스트리트저널)라는 비판과 조롱이 이어졌다. 국민투표가 부결된 뒤 ‘기본소득스위스’는 ‘23% 찬성’이란 현수막을 내걸고 “이제 첫걸음을 뗐다”며 기본소득 도입 필요성을 공론화한 것에 큰 의미를 뒀다. 기본소득은 소득불평등 심화와 성장잠재력 약화, 로봇과 인공지능(AI) 등 기술발전에 따른 일자리 감소로 출구를 잃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대안이라는 공감대를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인식의 깊이는 얕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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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과 기본소득이 ‘병든’ 자본주의를 치유하는 ‘묘약’은 아니다. 사람보다 시장논리를 앞세워온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한 ‘최소한의 도덕적 안전장치’일 따름이다. 국가의 정책과 제도는 시장논리가 아닌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그래야 ‘악마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인간의 얼굴’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명제는 아직도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