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왜 눈앞에 닥친 위기도 못보는가?
KBS 2015.03.23(월) 박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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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훈의 대담한 경제 #19]
과연 금리인하로 최악의 경제 불황을 막을 수 있을까?
한국은행이 지난 12일 전격적인 금리 인하를 단행해 사상 처음으로 기준금리가 1%대로 떨어졌다. 이에 최경환 부총리 등 많은 경제 관료들은 이번 기준금리 인하가 미약한 경기회복과 저물가 상황을 완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며 크게 환영했다. 이처럼 고위 경제 관료들 중에는 금리만 낮게 유지하면 일본과 같은 장기불황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우리 경제관료들이 흔히 장기 불황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는 나라가 바로 일본이다. 1989년 일본의 버블 붕괴를 피상적으로만 보면 금리만 잡으면 된다고 착각하기가 쉽다. 당시 일본 정부가 금리를 인상하고 대출 총량을 규제한 직후 경제 거품이 붕괴되면서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이 장기 불황에 빠져든 근본 원인은 금리 인상이 아니라 빚더미로 지탱하던 일본 경제의 불균형이 이미 ‘임계상태(Critical State)’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경제는 아주 작은 경제 여건의 변화만으로도 언제든 붕괴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금리 인상은 경제 거품을 터뜨리는 단순한 방아쇠가 됐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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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의 한국 경제 상황도 빚더미로 임계상태에 빠져들고 있다는 점에서 1989년의 일본과 큰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금리만 낮춘다고 해서 최악의 경기 불황이 닥쳐오는 것을 근본적으로 막을 수 없다. 그렇다면 임계 상태의 경제는 과연 언제 어떻게 무너지는 것일까? 베를린 장벽의 붕괴 과정을 통해 임계상태의 경제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가늠할 수 있다.
임계상태의 경제는 ‘베를린 장벽’처럼 붕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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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철통같던 베를린 장벽이 사소한 해프닝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어이없는 오보 하나로 하루 아침에 무너진 것은 동독의 경제 불황과 거듭되는 대규모 소요사태로 인한 사회 불안이 이미 임계상태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복잡계 경제학(Complexity Economics)에서 볼 때, 임계상태에 이른 경제나 정치상황은 아주 작은 충격만으로도 쉽게 붕괴되거나 파국을 맞게 된다. 이 때문에 경제 붕괴나 장기 불황 같은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단순히 금리 인상 같은 ‘방아쇠(Trigger)’만 막아서 되는 것이 아니라 임계상태(Critical State) 자체를 해소해야 한다.
임계상태에선 작은 모래알 하나가 산사태를 일으킨다
1987년 퍼 백(Per Bak)이라는 물리학자가 동료와 함께 뉴욕의 한 연구소에서 어린이들이나 할 것 같은 모래 놀이를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모래알을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어떻게 되어가는지 반복해서 관찰했다. 모래알을 하나씩 테이블 위로 떨어뜨리자 모래알이 점차 쌓이면서 작은 산 모양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떤 모래알 하나는 갑자기 경사면을 따라 흘러내리며 산사태를 일으키기도 했기 때문에, 모래산은 높아졌다 낮아졌다를 반복하면서 쌓여갔다.
[출처 : Per Bak, How Nature Works: the science of self-organized criticality, Copernicus (1996)]
퍼 백은 이 모래놀이의 끝없는 반복 실험을 위해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이를 재연했다. 그 결과 많은 모래알이 모래산 위에 그대로 쌓여갔지만, 아슬아슬하게 무너져 내리기 직전의 시점, 즉 임계점(Critical Point)에 다다른 상태에서는 똑같은 모래알 단 하나에 수만 개의 모래알이 무너져 내리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 흥미로운 발견은 지진이나 태풍 등 많은 자연현상뿐만 아니라, 주식시장이나 경제 상황에 대한 분석에서도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실제로 금융시장의 불균형이 극대화되어 이미 임계상태에 다다른 경제는 지극히 작고 미세한 변화에도 대격변을 일으키는 현상이 끊임없이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별다른 이유 없이 전세계 주가가 대폭락해 무려 1조 7천억 달러(우리 돈 1천 9백조 원)의 투자 손실을 가져왔던 1987년 10월 19일 ‘블랙 먼데이(Black Monday)’ 사태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금리 인상만 지연시킨다고 경제가 살아날까?
본 기자가 취재과정에서 만난 고위 경제관료들 중에는 금리 인상 같은 정책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장기 불황도 오지 않을 것이라며 안이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경제의 큰 흐름은 이 같은 단편적인 정책만으로 막아내기에는 그 파고가 너무나 거대하고 막강하다. 설사 예상할 수 있는 모든 방아쇠(Trigger)를 막아 낸다고 해도 임계상태(Critical State) 자체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경제는 아주 작은 충격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다. 그 ‘작은 충격’은 미국의 정책금리 인상일 수도 있고, 그리스의 유로화 탈퇴나 말레이시아의 금융위기가 될 수도 있다.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충격에 무너질 수도 있고, 심지어 1987년의 ‘블랙먼데이’처럼 아무런 충격 없이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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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복잡한 세상(Complexity)’을 이해하지 못하고 기존의 경제학만 고집하는 일부 경제 관료들은 무한히 많은 ‘방아쇠 후보’ 중 하나일 뿐인 ‘부동산 값 하락’만 막겠다며 대한민국 경제에 남아 있는 모든 여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하지만 부동산 값 하락을 막으려는 정부의 정책은 빚더미를 더욱 부풀리고, 가계의 남아 있던 소비 여력까지 앗아가 우리 경제를 더욱 위험한 임계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기준 금리를 낮추고 끝없이 돈을 풀면 당장의 부동산 값 하락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계 소득 감소와 구조적인 청년 실업 문제와 같은 우리 경제의 근본적인 모순을 해소하지 않으면, 빚더미로 촉발된 우리 경제의 불균형은 더욱 위험한 상태로 치닫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같은 정책 기조가 장기적인 경제 회생 계획이 없이 단순히 ‘내 임기만 아니면 된다(Not In My Term)’는 근시안적인 판단에 기초한 것이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지난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OMC)가 내다본 미국경제의 회복 속도가 다행히(?) 생각보다는 다소 더딘 것으로 나타나, 우리가 불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이나마 더 벌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생산가능인구 비중이 감소하기 시작한 데다 혁신의 속도까지 떨어진 우리 경제가 단순히 저금리 정책만으로 회생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저금리에 취해 낭비한다면, 경제 관료들의 임기까지라면 몰라도 우리의 미래까지 구원하기는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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