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중간계층 위기의 신호..선의를 선의로 돌려받는다는 신뢰가 무너진 한국사회

배셰태 2015. 2. 8. 11:01

[김인수 기자의 사람이니까 경영이다]

선의를 선의로 돌려받는다는 신뢰가 무너진 사회:중간계층 위기의 신호

매일경제 2015.02.06(금) 김인수 논설위원

http://m.mk.co.kr/news/headline/2015/124065

 

화가 나면 폭언이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주차를 잘못했다고 항의하는 행인을 차 주인이 야구방망이로 폭행한 사건이 그런 예다. 심지어 폭력이 스스로를 향하는 경우도 있다. 사기를 당해 분노한 나머지 자기 몸에 불을 붙인 여성의 사연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들에 대해 분노를 참지 못하는 `분노조절장애`로 진단한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증가 추세라는 것이다. 홧김에 저지른 범죄가 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예전의 한국인은 이렇지 않았다. 화병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한국인은 화를 속으로 삼키는 민족이었다. 오죽했으면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을 `한(恨)`이라고 했을까? 안타깝고 억울하고 응어리진 마음을 안고 사는 게 한민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점점 한국인들은 분노나 화를 폭력으로 발산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단서를 8년 전 제주공항에서 찾는다. 당시 기상악화로 비행기 이륙이 잇달아 취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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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승객이 의자를 던져서 폭력을 행사한 이유는 분명했다. 부당하게 순서가 밀려, 비행기를 못 타는 일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공정한 순서대로 비행기를 탄다고 믿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분노를 폭력으로 점화시키는 방아쇠는 `힘이 없다는 이유로, 힘이 있는 자에게 밀려 억울하게 당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이었다.

 

인간은 타인에게 선의를 베풀면 선의가 돌아오기를 바란다. 그게 본성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상호성`이라고 한다. 선행은 선행으로 보상받고, 악행은 악행으로 벌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게 공정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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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사건으로 나는 `직접 상호성`만으로는 건강한 사회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직접 상호성은 내가 B에게 선행(악행)을 베풀면 직접 상대방인 B가 내게 선행(악행)를 베푼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내가 아무리 카운터 직원들을 친절하게 대하더라도, 그들 역시 내게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이는 한계가 있다. 나의 선의와 그들의 친절은 내가 `공정한 탑승`이라는 보상을 받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회냐, 아니냐를 가르는 상호성의 핵심은 `간접 상호성`이다. 내가 B에게 선의를 베풀면, B가 아닌 C와 D 등 제 3자 역시 내게 선의를 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B에게 악행을 저지르면, B가 아닌, 제 3자가 내게 악행으로 벌을 내린다는 게 간접 상호성이다. 그 벌은 직접적일 필요가 없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아무도 나를 돕지 않으면 그게 벌이다. 나와 대화를 피하는 등 `왕따’를 놓는다면 그것 역시 벌이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것은 절대 가벼운 벌이 아니다.

 

건강한 사회일수록 간접 상호성이 잘 작동한다. 내가 착하게 살면, 내가 잘 모르는 다른 사람들도 내게 착한 행동을 하고, 선의를 베푼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는 사람들간에 신뢰가 높다. 낯선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그가 내게 선의를 보일 것이라고 믿는다. 당시 승객들이 직접 얼굴을 대면한 체크인 카운터 직원들뿐만 아니라, 그 뒷편 보이지 않는 사무실에 앉은 높은 직급의 직원들도 승객들에게 선의를 보일 것이라고 믿었다면, 폭력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병든 사회는 그렇지 않다. 내가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어도, 다른 제3자는 언제든 내 뒤통수를 때릴 수가 있다. 공항에서 내가 목격한 모습은 저신뢰 사회의 전형이었다. 승객들은 권력이 있는 제 3자가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고 먼저 탑승할 것이라는 의심에 사로잡혀 있었다.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그 같은 의심은 결국 의자를 던지는 폭력으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어떤 사회일수록 간접 상호성이 힘을 발휘할까. 평판이 제 역할을 하는 사회다. 내가 B에게 악행을 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뒷담화를 하게 된다. 그러면 내 평판이 나빠진다. 그래서 나와 별 상관이 없던 제3자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없고, 공동체에서 소외되는 벌을 받는다. 반면 내가 좋은 일을 하면 사람들이 나에 대해 좋은 뒷담화를 하게 된다. 내 평판이 좋아지고 나는 타인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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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판의 힘이 작동하고, 간접상호성이 효과를 발휘하는 사회는 투명하고 공개된 사회다. 만약 악행을 은밀하게 숨길 수 있다면, 그래서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른다. 사회 네트워크가 폐쇄적인 곳에서는 사람들이 약간의 돈을 얻기 위해 자신의 평판을 기꺼이 팔아 넘긴다. 영국 국회의원들이 그런 예다. 이들은 국민의 세금으로 몰래 쓰레기 봉투값(2.99파운드), 유료 포르노 영화 요금까지 지불했다. 시민단체의 끈질긴 정보공개 청구 노력으로 이 같은 사실이 2009년 드러났다.

 

평판과 간접상호성이 효과를 발휘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분노`를 폭력적으로 분출할 이유가 줄어든다. 선의로 행동하면, 결국에는 자신에게 이득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세계적인 심리학자 애덤 그랜트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교수가 말했듯이, 남에게 베푸는 기버(giver)가 성공한다. 남의 것을 빼앗는 테이커(taker)는 실패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다. 선의를 선의로 돌려받을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 내가 공항에서 목격했듯이 분노를 폭언으로 표출하지 않으면 손해를 볼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남에게 폭언, 폭력을 가하고 때로는 스스로를 자해하는 폭력을 쓴다.

 

이런 사회는 권력을 갖고 있는 상류층만이 안전한 사회다. 사실 상류층은 평판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평판이 나빠져서 제 3자의 선의(간접 상호성)을 기대할 수 없다고 해도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회사 돈을 횡령해 감옥에 갇힌 모 재벌 회장의 가석방에 정부 부총리와 여당 대표까지 나선 게 그 증거다. 내가 인터뷰했던 세계적인 심리학자인 이안 로버트슨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 교수, 데이비드 데스테노 미국 노스이스턴대 교수에 따르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비윤리적이 되고, 뻔뻔해지면, 이기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도 많다. 내가 테스테노 교수를 인터뷰해 쓴 기사(http://goo.gl/jjSXmM)에 그 증거들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일수록 중산층 내지, 중간계층은 더욱 좌절한다. 선의를 선의로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상호성에 대한 믿음은 중간계층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중간계층은 상류층만큼은 아니더라도 지키고 싶은 이익이 있다. 가진 게 없는 사회 하층민과는 다르다. 그러나 중간계층은 자신의 힘만으로 그 이익을 지킬 수가 없어 타인의 선의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샐리 앵글 메리(Sally Engle Merry)의 연구에서 밝혀졌듯이, 평판에 가장 민감한 사람들이 중간계층인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선의를 보여도 누군가 제3자로부터 뒤통수를 맞을 수 있는 세상이라면 중간계층 역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렇다면 결국 중간계층이 선택할 방법은 무엇이겠는가? 타인의 선의를 기대할 수 없다면, 상류층처럼 권력을 이용해 은밀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가 없다면 남은 방법은 무엇인가? 상대방에 대한 폭언과 폭력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갈수록 분노조절장애에 빠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경제가 발전하고 성장하면서 이른바 무엇인가 지킬 이익을 가진 중간계층 숫자는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낯선 타인의 선의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 구성원간의 신뢰 수준은 높아지지 않았다.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언제든 내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 불안은 분노를 낳고, 결국엔 폭언과 폭력으로 연결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봐야 한다. 지금 당장 누군가의 악행으로 손해를 본다고 해도, 나중에는 선의로 돌려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를 좀 더 쉽게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폭언과 폭력은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 아니다. 결국은 감옥에 가는 등 사회 체제의 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도 폭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중간계층이 심각한 위기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신호일 것 같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경제성장이 계속 정체되고 있어 중간계층도 자신의 몫을 키우기가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남의 선의마저 기대할 수 없다면, 중간계층의 분노조절장애는 더욱 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