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윤평중 칼럼] 대한민국의 생명줄, ‘21세기 그레이트 게임’...국가가 없으면 자유와 풍요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배세태 2022. 1. 22. 14:55

[윤평중 칼럼] 대한민국의 생명줄, ‘21세기 그레이트 게임’
조선일보 2022.01.21 윤평중 한신대 명예교수·정치철학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1/21/NMVA4ZTKBVDSPIUCQNULYTEOBM/

20대 대선은 외교·안보를 경시하는 현대 한국인의 자폐적 인식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특징은 대한민국의 생명줄인 국가 대전략이 총체적 실종 상태라는 사실이다. 사회적 관음증에 다름없는 녹취록 논란과 시대착오적 무속 타령이 국가 백년대계에 관한 공론(公論)을 통째로 지워버렸다. 심리적 내전 상태인 진영 간 적대감은 정치적 경쟁자를 악마화하는 마음의 습관을 키운다. 대한민국의 존속을 위협하는 외적(外敵)보다 나라 안의 정적(政敵)을 더 증오하는 한국인들이 많은 것도 사회적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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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18일 오후 서울 여의도 CCMM빌딩에서 열린 2022년 소상공인연합회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박수를 치고 있다. 이덕훈 기자

1885년 4월, 영국 함대가 거문도를 점령했다. 영국은 해밀턴 항(Port Hamilton)으로 명명한 거문도에 해안포 진지와 병참 기지까지 건설했다. 하지만 당시(고종 22년) 조선은 거문도 점령 사실 자체를 한 달 동안이나 알지 못한 채 당쟁에 바빴다. 거문도 사태는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제국 영국’과 ‘제국 러시아’가 세계 패권을 겨룬 19세기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의 현장이었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진출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가 위협받는 데 대응해 영국은 거문도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함대를 공격할 전략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

남해의 평화로운 섬이 세계대전의 발화점이 될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한말 조야(朝野)는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그레이트 게임에 철저히 무지하고 무력한 데다 산산이 분열된 상태였다. 국가 운영(Statecraft)의 기본을 결여한 희대의 암군(暗君) 고종과 지배 계층의 지리멸렬함은 청일전쟁(1894), 아관파천(1896), 러일전쟁(1904)에 이은 망국으로 이어졌다. 영국이 1887년 2월 거문도 요새화를 포기하고 전격 철수했을 때 그 소식을 가장 늦게 알게 된 나라도 조선이었다.

21세기 한국은 열강에 휘둘리던 19세기 조선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 정세의 소용돌이에 응전하는 외치(外治)에 대한 국민의 무관심과 내부 분열, 전략 마인드 부재는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 전(全) 세계와 교류해 이룩한 세계 10대 경제 강국의 위상에 맞지 않는 폐쇄적 소국(小國) 의식이 문제다. 국가의 운명을 대륙 문명과 한반도에 국한해 바라보는 일국주의적 한국 민족주의의 폐해가 심각하다. 현재진행형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위협을 한반도와 전혀 상관없는 국지적 분쟁으로 여기는 우리의 인식이 단적인 사례다. 조선이 거문도 사태를 그레이트 게임의 안목으로 읽지 못했던 것과 빼닮았다.

미·중 패권 경쟁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신흥 강국과 기존 강대국의 전쟁)을 촉발할 수 있는 현실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한반도와 직결된 전(全) 지구적 그레이트 게임의 일환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협박이 중국의 대만 침공 위협과 뗄 수 없이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과 러시아는 ‘패권국(미국)의 전횡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공동 결의를 천명했다.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과 중국의 대만 침공에 맞서 유럽과 인도태평양 두 개 전선을 감당할 국가 의지가 있는가?’라는 질문은 분열된 ‘제국 미국’이 직면한 최악의 난제다.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가를 최대 도전이다. 하지만 다른 진영을 경합(競合)과 공존의 상대로 여기기는커녕 ‘청산과 박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적 적대 정치로는 그레이트 게임에 응전할 국민적 합의 도출이 불가능하다. ‘제국 중국’의 대만 통일 의지는 한반도 상황과 인계철선처럼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 복속된 홍콩이 100년간의 자유와 활기를 1년도 못 가 상실하는 모습은 전체주의적 대륙 문명과 미래 관계를 고민하는 한반도에 경종을 울린다. 실전 배치된 북한 핵미사일을 국가적 위기로 느끼지 않는 우리 현실보다 대한민국 국가 대전략의 부재를 아프게 증언하는 것도 없다.

먹고사는 문제는 정치의 근간이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가 호소력을 갖는 이유다. 그럼에도 2022년 현재, 우크라이나와 대만이 직면한 국가 절멸(絶滅) 위기는 ‘나라가 무너지면 경제도 없다’는 삶의 진실을 증언한다. 국가가 없으면 자유와 풍요도 순식간에 사라진다. 외교·안보가 나라의 명운을 가르는 역사적 순간이 있다. 이번 대선이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이다. 21세기 그레이트 게임에 투철한 리더십만이 나라와 국민을 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