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가쓰라-태프트 협약] 미국의 책임을 거론함을 저승의 태프트가 안다면 "남의 나라가 도와주지 않아 망했다고 원망하는 자가 지도자가 되면 당신 나라는 다시 망할 것”

배세태 2021. 11. 13. 16:26

※The Taft-Katsura Memorandum Reconsidered

윌리엄 태프트는 행정학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1904년 루스벨트 대통령 밑에서 육군(전쟁) 장관이 된 태프트는 1905년 일본 천황도 만났으며 이때 러일 전쟁의 위험도 논의하였다. 가쓰라 총리대신을 만나 협의한 각서가 “태프트-가쓰라 각서(memorandum)”이다. 가쓰라 타로는 아베 신조 총리가 최근 기록을 깨기 전까지 일본의 최장 총리 재임자였다. 태프트는 이것이 미국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라 자신 개인의 의견이라고 밝혔다. 그 내용은 미국과 일본이 각각 필리핀과 조선을 차지함을 양해한다는 협정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 및 필리핀에게 자치능력이 없다고 이미 인식해 온 미일 양국이 각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이며 이를 통해 일본에게 한국을 넘겨주는 보장은 아니라는 해석도 있다.(* 이 새로운 지적은 http://www.jstor.org/pss/3636866). 어쨌든 조선으로선 유리할 수 없는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가자 태프트에게 대통령과 대법원장 중 어느 자리를 원하느냐고 타진하는데 이때 태프트는 아내(넬리) 부추김에 따라 대통령 자리를 요구한다. 루스벨트의 후광으로 그는 손쉽게 1909년 27대 대통령(1909-1913)이 된다. 대통령이 되자 16차 개헌을 통해 연방소득세가 부과될 수 있게 했으며, 17차 개헌을 통해 그때까지만 해도 각 주에서 간선제로 뽑던 연방 상원의원을 직선제로 뽑도록 하는 큰 제도적 변화를 이룩했다. 그의 정책 기조는 대외적으로는 달러 외교, 대내적으로는 대기업의 독과점 규제.

그러나 그가 막상 대통령이 된 후에 전임자인 루스벨트의 정책을 되돌리는 바람에 루스벨트와 불화를 빚었고 그 때문에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책을 복원하기 위해 은퇴를 뒤집고 다시 차기 대통령 선거에 뛰어든다. 현직 대통령 태프트와 전직 유명 대통령 루스벨트의 싸움으로 공화당은 양분되었다. 루스벨트의 예상과는 달리 당원들이 과거의 영웅이던 자신을 버리고 현직 태프트를 재선시키고자 그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선택하자 화가 나 공화당을 탈당하고 독자 출마함으로써 공화당은 양분되었고 이 어부지리에 편승한 민주당의 윌슨은 531명의 선거인당 중 435명을 차지하는 압승. 겨우 8명만 얻은 태프트는 재선에 출마한 현직 대통령이 얻은 최저 선거인단이란 기록 보유자이다. 그런데 전체유권자의 득표에서는 윌슨 42%, 루스벨트 27%, 태프트 23%였으니 태프트-루스벨트로 분열되지 않았더라면 공화당에게 승산이 있었던 선거였다. 한국 대선의 이인제 사태를 미국판으로 예고해 준 사례.

태프트는 미대통령 중 최고 체중기록자(150kg). 필리핀 총독으로 근무할 때 친구인 본국 장관(Elihu Root)에게 근황을 보고하는 전보에 “오늘 말을 탔는데 기분이 기가 막혔네”라고 썼다. 그러자 루트 장관은 급히 전보로 다음과 같이 되물었다: “말은 괜찮나?” 그의 침대 한쪽 다리가 무게를 못 이기고 백악관 바닥을 뚫고 아래층 천정으로 빠져나왔으며, 대통령용 자동차를 새로 만들어야 했고, 욕조 안에 들어갔다 몸이 끼어서 빠져나오지 못하자 참모들이 버터를 몸과 욕조 틈새에 바르고 빼냈다.

태프트는 국내적으로는 행정학의 창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최초의 독립규제위원회인 ICC(주간통상위원회: Interstate Commerce Commission)의 역할을 강화하였고, 정부의 우편 업무를 개선하고 16차 헌법 개정을 통과시켰다. 재무 행정 부문에서도 중요한 개혁을 이루었다. 그전까지 각 부처는 자체적으로 책정한 예산요구액을 재무부에 내고 재무부는 그것을 그대로 의회로 넘겨 심의받는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요즘 한국 예산과정에서 본다면 ‘기획재정부의 예산사정’ 과정이 없었다. 태프트는 이를 개혁하여 각 부처의 예산요구액을 미리 검토받게 하는 행정부 자체 사정을 도입했다. 유명한 “절약과 능률에 관한 위원회”(the Commission on Economy and Efficiency)를 설치하여 예산제도를 연구하게 하였고 그 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부처가 아니라 대통령이 정부의 총괄적 예산안을 의회에 제출하게 하는 소위 ‘대통령의 예산’이란 제도를 확립했다.

윌슨에게 패배한 후 태프트는 예일대 법대 교수를 거쳐, 하딩(Warren G. Harding) 대통령 재직 시에 대법원장이 된다. 전직 대통령이 대법원장을 맡은 유일한 사례. 태프트는 실은 대통령보다 대법원장으로서 더 큰 업적을 남겼다. 혹평자들은 태프트는 처음부터 대통령감이 아니라 대법원장감이었다고 한다. 흔히 루스벨트를 독점규제란 명분의 대기업 탄압의 대표자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가 8년 동안 몰아낸 독점 기업보다 태프트가 4년 동안 몰아낸 독점 기업이 더 많았다. 한때 정치적 선후배에서 원수가 되었던 루스벨트와 태프트는 루스벨트가 죽기 직전에 서로 화해한다. 정치의 애증도 살아있을 때의 임시 특권일 뿐이니. 이 둘은 대기업에 대한 최악의 간섭주의자들이었다. 태프트는 역대 대통령 중 중간 수준을 약간 밑도는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태프트 이전의 대통령인 루스벨트의 딸(앨리스 루스벨트)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조선 왕실은 그녀를 억지로 한양으로 초청해 융숭히 대접하고는 부친인 루스벨트에게 조선을 잘 도와주도록 말해달라고 엄청난 돈을 썼지만 이미 조선은 자치 능력을 잃었다고 본 여긴 루스벨트는 외면했다. 아직도 한국의 대권 후보자가 미국 정치인 앞에서 태프트-가쓰라 각서를 들어 미국의 책임을 거론함을 저승의 태프트가 안다면 이리 답하지 않을까?:

“우리가 외면해서 당신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니라 망할만하니 우리가 외면한 것. 조선 멸망이 을사조약에 몇몇 대신들이 도장을 찍었기 때문이라거나, 남의 나라가 도와주지 않아 망했다고 원망하는 자가 지도자가 되면 당신 나라는 다시 망할 것”

https://www.jstor.org/stable/3636866
.

출처: 김행범(부산대 교수) 페이스북 2021.11.13
https://www.facebook.com/100000919407510/posts/6725490504158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