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 역사는 예언하지 않는다...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준다

배셰태 2021. 5. 4. 16:58

※[프랑스 혁명과 로베스피에르] 역사는 예언하지 않는다...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준다

1789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1793년 1월 21 일 부르봉 왕조의 막을 내리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를 혁명광장에서 단두대로 목을 자르는 잔인한 처형으로 외형적으로는 종결되었다. 수 많은 사람들, 적게는 2만명 많게는 10만명 이상을 희생시킨 과격 쟈코뱅당의 혁명은 그렇게 막을 내림과 동시에 또 다른 막을 올리는 시작이되었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바로 그 날 로베스피에르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직접 보고 프랑스의 실권을 쥔 집정관으로 취임하였다.

프랑스 혁명의 주역이었던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언제나 프랑스 혁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이름들이다. 과격파인 쟈코뱅당의 리더였던 이 세 사람 중 마라와 당통은 결국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제거되어 암살되거나 단두대에서 죽게되고 로베스피에르가 혁명의 종결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제 왕정을 끝내고 혁명정부를 이끌어가야 하는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을 지지해준 농민과 노동자에게 어떤 형태로라도 보상을 해주어야했다. 그들의 욕구인 잘 먹고 잘 살게해 주어야만 그의 지위가 견고해지기  때문이었다.

파리가 아닌 지방도시 출신인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는 파리의 명문대학교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되고는 파리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 서민을 위한 변호사 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는 서민인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을 위하여 귀족들과 영주들을 상대로 변론 하면서  인기를 얻었고 그 인기를 발판 삼아 삼부회의 평민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삼부회란 프랑스 특유의 비상임 의회제도로 귀족과 성직자와 평민, 이 세 부류의 대표로 구성되어 필요시 왕이 소집하여 의제를 토론하고 결의하는 의회제도이다. 평민의 대표가 된 로베스피에르는 왕정을 공격하는 파격적인 연설로 인기몰이를 하게 되고 왕정에 반대하는 과격 그룹인 쟈코뱅당의 리더가 되어 왕정을 무너 뜨리고 공화정인 국민회의를 여는 프랑스 혁명을 이루게 된다.

법률가이지만 경제에는 문외한인 로베스피에르는 최고 실권자가 된 후  "모든 프랑스 어린이들은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 라고 선포하고 우유값을 반값으로 내리라고 지시한다. 이것이 그가 서민을 위한 정책이자 혁명을 이루는데 절대적인 지지를 한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중요한 경제정책이었다. 한 동안 우유값이 내려가서 우유를 마시는 서민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낙농을 하던 농민들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우유를 공급하느니 아예 소를 도살하여 고기로 파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여 소를 죽여 고기로 팔자 우유는 품귀 현상이 발생하여 이전보다 몇 배 이상으로 폭등하게 되었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농민들을 불러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물었다. 낙농하는 농민들이 건초 가격이 비싸서 할 수 없이 소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이제 건초업자들에게 건초를 반값으로 내리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건초업자들은 건초를 헐값에 팔아 생산가도 못 건지니느 아예 불 태워버렸다. 그러자 건초값이  폭등하였다. 낙농하는 농민들은 이제는 정말 우유 생산을 하지 못하게 되고 우유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우유는 귀족들이나 마시게 되고 서민의 자녀들은 우유 구경도 못하게 되었다. 결국 처음 우유값에 손 대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첫번째 경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가버렸다.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를 파리의 혁명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하면서 앙샹레짐을 무너뜨린 후 프랑스의 집정관이 된 로베스피에르는 과격한 정책을 계속하다가 1794년 7월 28일 자신도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역사는 예언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준다.

출처: 윤병화 페이스북 2021.05.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