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1)

■숙의민주주의가 독이 될 수 있는 이유...광장의 정치에서는 숙의가 아예 불가능하다

배셰태 2017. 10. 23. 15:15

숙의민주주의가 만능? 독이 될 수 있는 이유

데일리안 2017.10.23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http://m.dailian.co.kr/news/view/668507

 

김지형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장이 2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건설 재개' 공론화 결과를 발표한 후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22일,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 과정이 마무리된 만큼 건설을 조속히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22일 공론화 결과에 대한 ‘대통령 입장’을 통해 “지역주민이 안심할 수 있도록 원전안전기준을 더욱 강화하겠다”면서 “정부가 이미 천명한 대로 탈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차질 없이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공사 중단 결정이 난지 3개월여 만이다. 그간 이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는 심한 홍역을 치렀다. 사실 이는 애초에 문제될 게 없었던 일이다. 이미 지난 정부에서 오랜 연구와 논의, 복잡한 계약과정을 거치고, 관계법령이 정한 절차에 따라 착공된 사업이었다. 한국 원전기술의 고도화를 확인할 수 있는 상징적 사업이자, 국가 에너지 정책의 주요 부분을 감당할 과업이기도 했다.

 

3개월 중단에 1천억 추가비용

 

문 대통령은 그걸 중단시키는 게 대통령 공약사업임을 강조해왔는데, 그런 인식이나 주장이 더 큰 문제다. 선거공약은 ‘과잉’의 위험성을 수반하는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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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은 비록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중단시키는 데는 실패했으나 탈원전 정책은 확고히 밀고 나가겠다는 태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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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참여단엔 국민대표성 없다

 

공론화 과정을 거치면서 숙의 민주정치의 전범을 보여주지 않았느냐고 해서는 안 된다. 문 대통령이 공약사업임을 강조하면서 이미 공사 중단 방침을 정해 제시한 후였다. 그는 취임 후 이 문제뿐만 아니라 주요 공약사항들을 대통령 지시 하나로 추진케 하는 리더십 유형을 보여 왔다. 신고리 원전 공사 중단도, 합리적 논리적 반대의견이 그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면 아마 일도양단식으로 행해졌을 것이다.

 

문 대통령이 노무현 정부 때의 참여정치에 매료된 듯하거니와, 국민참여형 숙의민주정치라는 형식으로 이 문제를 충분히 돌파할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을 수 있다. 자신의 국정수행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여전히 고공행진을 하고 있는 때인 만큼 시민참여단의 전폭적 찬성 또한 믿어마지 않았을 법하다.(반대로 탈원전 정책의 조급한 시행이 전기의 품질 저하, 발전 비용의 상승 등을 초래함으로써 훗날 실패한 정책의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을 우려해서 명분 갖춘 후퇴를 택했을 가능성도 전적으로 배제하긴 어렵지만…. 착각일까?)

 

정작 눈길이 가는 부분은 문 대통령의 ‘숙의 민주주의’ 예찬이다. 국민이 모든 정치 행정의 논의‧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참여정치’의 한 형태일 수도 있고, 그 자체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요 국정과제를 국민이 평가단 혹은 배심원단으로 참여해 평가하고 사실상 결정까지도 주도하게 하는 형태의 정치를 하고 싶어 하는 인상이다.

 

그 이상(理想)을 폄훼할 뜻은 없다. 주권자인 국민으로 하여금 국정의 전 과정을 감시‧감독케 하는데서 나아가 직접 참여하게 하겠다고 하는데 마다할 사람이 있겠는가. 문제는 5000만 국민 모두가 그러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극히 소수만이 ‘국민’의 이름으로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그것을 주도하는 측이 정부라고 할 때는 한계가 너무 뚜렷해진다.

 

문 대통령이 상찬해 마지않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경우 이미 대통령의 공사중단 방침이 제시된 이후에, 정부 주도로 구성되었다. 9명의 위원 가운데 원자력 전문가눈 없었다. 이 위원회에 의해 시민참여단이 과학적 방법으로 구성됐다고 하더라도 그게 국민 대표성이나 객관성을 담보하는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

 

참여정치라든가 숙의민주주의라는 것은 대의민주정에 대한 실망 혹은 불신에서 비롯됐다. 특히 진보좌파는 직접민주정치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대중의 지지’는 좌파의 것이라는 믿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건 현실에서 직접민주정치의 전면적 도입은 불가능하지만 그 방식으로 대의민주정치를 보완할 수는 있다. 그걸 명분으로 하는 것이 국민참여형 숙의민주주의라고 여겨진다.

 

정파적 이해를 떠나 주권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안을 인식하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찬반을 결정하거나 대안을 내놓는다는 취지는 좋지만 국정현안마다 그 방법을 택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대상 과제를 결정하는 것 또한 정부 차지가 된다. 게다가 긴급을 요하는 사안까지도 정략적 판단으로 숙의에 맡길 우려가 없지 않다. 진행 중인 공사를 3개월씩이나 중단시키는 식의 숙의정치는 위험하다는 뜻이다.

 

대의정치 자체가 숙의민주주의

 

문 대통령에 대한 여론 지지율이 여전히 천장을 뚫을 기세인데도 숙의 결과가 반대로 나타났다는 점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만큼 정부가 공정하게 이 일에 임했다고 자랑하고 싶겠지만 문제는 그처럼 간단치 않다. 대중의 지지가 줄어들기 시작하면 이런 방식이 정부의 발목을 잡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숙의 결과에 따르겠다는 식이라면 무능 무책임 정부로 규정되기 십상이다.

 

<중략>


민중의 지지를 확신하고 있는 정부일수록 대의기구의 역할을 줄이고 이들의 역할을 늘리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정당이나 의회의 나태 무책임 오만 비능률 집단이기주의 등을 보면 제도보완은 절실한 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참여정치가 의회의 권한 역할 기능을 과도하게 그리고 의도적으로 위축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한마디 덧붙여 둘 바가 있다. 광장의 정치에서는 숙의가 아예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