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칼럼] 低成長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
조선일보 2015 07.11(토) 송희영 주필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5071003782&d=2015071003782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 원론(Economics)'으로 경제학에 입문한 사람이 적지 않다. 1948년 초판이 나온 이래 전 세계 40개 이상 언어로 400여만부가 팔렸다. 노벨상까지 받은 이 천재는 1961년 판(版)에서 구소련의 국민소득이 1984년 미국을 뛰어넘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새뮤얼슨의 소련 예찬은 20년 후에도 그대로였다. 1980년 개정판에서는 소련이 2002년엔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고 썼다. 시기만 바뀌었지 소련이 미국을 앞설 것이라는 믿음은 굳건했다. 실제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소련 경제는 연평균 6% 성장률을 기록했다.
새뮤얼슨 눈에는 국가 주도의 계획경제가 낳은 장점만 보였을 것이다. 당(黨)이 우주를 정복하라고 지시하면 유리 가가린이 세계 최초로 우주 비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최고 성능의 총이 필요하다고 주문하면 20세기 최고의 무기 중 하나로 꼽히는 AK47 자동소총이 발명됐다. 독재 체제가 일시적으로 환상적인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한강의 기적' 이전에 증명됐던 셈이다.
박정희 대통령 재임 17년 동안 우리 경제는 평균 9.1% 성장했다. 전두환 대통령 7년은 8.7% 성장 기록을 남겼다. 올 성장률이 2%대로 주저앉는다는 소식을 들으며 많은 이가 군부(軍部)독재 시대의 향수(鄕愁)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 반(半)만이라도 해달라'며 버벅대는 딸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개발독재 시대의 밀어붙이기식 정책을 찬양하는 말도 들린다.
어쩌면 대통령이 국회의장의 청와대 출입을 막고 여당 원내총무를 배신자로 몰아 축출한 것도 '그때 그 시절'의 방식이 옳았다고 믿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입법부란 통치자가 하자는 대로 찬성표를 던지는 로봇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일까. 국회가 대통령이 하려는 일마다 발목을 잡으니 성장률도 추락하지 않느냐는 것일까.
인류의 경제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는 '일당독재나 전제(專制)정치 아래서 고도성장은 가능한가' '독재국가의 국민도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 다음 문장이 중요하다. '다만 그것은 일시적으로만.' 망해버린 소련이 상징적인 증거다. 소련도 한국처럼 독재 체제 아래서 성장 기반을 다졌지만 그 뒤 가는 길은 한국과 완전히 달랐다.
<중략>
그러나 이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명박 대통령 이래 세 번 2%대 성장을 기록하더니 올해 또 2%대 성장이 예상되고 있다. 2% 성장으로는 청년 실업은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 샐러리맨들 생활도 나아지기 힘든 벽에 부닥쳤다. 성장의 배당금은 몇몇 재벌, 고소득 금융인들, 대기업 정규직, 공무원 계층에만 돌아가고 있다. 이 와중에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권력 놀음에는 한국 신기록이 나올 만큼 재빠르게 행동한다. 그러면서 비정규직 문제나 직장 여성들의 고민을 풀어주는 일에는 게으르거나 무관심하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파동에서 보았듯 공무원들은 무능한 단계를 넘어 사태를 악화시키곤 한다. 국가 통치의 최상위층에 자리 잡은 정치인·관료 집단은 고장난 불도저처럼 엉뚱하게 일을 키우기 일쑤다.
어쩌다 지배층의 문제 해결 능력이 불량 철강을 양산하던 소련처럼 경직화되고 말았다. 국민에게 믿고 따르자는 말을 도무지 할 수 없는 지경이다. 저성장이 장기화할 여건이 지금처럼 완벽한 시기는 없었다. 그런데도 정치권은 우리 경제를 새뮤얼슨이 소련 보듯 하고 있다. 저성장 터널의 끝에서 과연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시사정보 큐레이션 > 국내외 사회변동外(1)'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국의 기업들이 직원을 채용할 때 스펙보다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0) | 2015.07.12 |
---|---|
한국, 일본·중국보다 못한 지배구조 후진국...특정 1인(지배주주) 이익만 중시 (0) | 2015.07.12 |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올해 안에 금리 인상할 것" (0) | 2015.07.11 |
한국을 대표하는 두 기업.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중국시장 동병상련' (0) | 2015.07.10 |
한국경제에 `쿼드러플(quadruple) 쓰나미` (0) | 2015.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