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보수의 탐욕, 진보의 위선 - 한국 정치의 도덕적 붕괴

배셰태 2025. 11. 22. 19:38

※보수의 탐욕, 진보의 위선 - 한국 정치의 도덕적 붕괴

by Jean Cummings, Political Columnist
November 21, 2025

한국의 정치 지형을 진보와 보수로 나누는 일은 이제 거의 의미가 없다. 이념의 언어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내부의 실질적 행위는 이미 이익 카르텔화된 권력 구조로 수렴되고 있다.

다시 말해, “보수”와 “진보”는 더 이상 가치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 자원을 재분배 받는 방식의 차이에 불과하다.

보수 정치세력의 부패는 대체로 눈에 띄고 노골적이다. 산업화 시기부터 그들은 국가를 ‘개발의 주체’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정치와 재벌의 공생 구조가 견고하게 뿌리 내렸다.

정경유착은 한국 근대화의 어두운 그림자였으며, 공기업 인허가, 국책사업, 대기업 납품 등은 정치자금 유입의 통로로 기능해 왔다. 기업은 이권을 얻고 정치인은 자금을 얻는, 명확한 거래의 형태를 가진 부패였다. 탐욕의 문제였지만, 최소한 그 거래의 성격은 드러나 있었다.

반면 진보 정치세력의 부패는 훨씬 더 은밀하고 교묘하다.  그들은 도덕과 정의를 정치적 면허증처럼 사용한다. 입으로는 약자를 외치고, 뒤로는 약자를 ‘자산화’한다.

노조, NGO, 시민단체, 연구재단, 복지프로그램, 사회적 기업 등 수많은 이름을 내세워 국가 보조금과 예산을 사유화하는 정교한 네트워크를 만든다. “도덕적 언어”가 곧 돈줄이 되는 기형적 구조다.

‘사회적 약자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예산은 정당성을 확보하고, 국민의 혈세로 얻어진 자금은 운동권 출신 인맥 네트워크를 따라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드러난 사건들은 한국 정치권에 고착된 구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복지재단과 여성, 인권단체들이 국가 지원금을 받으며 사업성과를 허위 보고하거나 보조금을 사적으로 전용한 사례들은 단순한 관리 부실이 아니라, 권력형 보조금 정치의 전형적 방식이었다. 최근 적발된 여러 보조금 비리만 보아도 이 구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되는 낙하산 인사와 공공기관 자리 나눠 먹기는 ‘도덕’을 외치는 권력일수록 얼마나 빠르게 도덕을 자산화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복지와 정의를 명분으로 설립된 수많은 공공단체와 재단은 실제로 정권 친화적 인사들의 생계형 권력 생태계로 기능해 왔다.

검찰 인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최근의 인사 배치는 정권의 이해를 지키기 위해 국가권력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드러내며, 국민의 세금이 정치적 충성의 보상 체계로 흘러가는 현실을 다시 확인시켰다.

문제는 이러한 부패의 비용이 결국 국민에게 전가된다는 점이다. 특정 네트워크로 예산이 편중되는 순간 재정적 손실은 국가 채무 증가, 세금 부담 확대, 필수 예산 축소의 형태로 돌아온다. 혜택은 소수가 챙기지만, 그 부담은 다수가 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재명 정권 이후 급증한 정책사업, 보조금, 대형 프로젝트와 방만한 재정 운영이 만들어낸 부담은 결국 국민과 미래 세대, 특히 아직 사회에 첫발도 내딛지 않은 소중한 우리 청년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저출산으로 인해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미래로 더욱 귀중해진 상황에서, 정권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그들의 삶이 시작되기도 전에 앞길을 짓누를 재정적 족쇄를 만들어버린 셈이다.

여기에 정권은 국내에서는 국민을 기만하며 권력 유지에 몰두하고, 대외적으로는 우방인 미국을 기만하며, 뒤로는 중국, 빅테크와의 밀착을 강화하는 이중 행보를 보여 앞으로 더 많은 강력한 추가 제재가 예고되고 있다.

이러한 이재명 정권의 기만적 외교는 결국 미국의 신뢰를 상실하게 했고, 트럼프 행정부의 강력한 제재와 관세, 투자 비용 증가라는 형태로 국민 경제에 또 다른 부담을 안긴 것이다.

‘사회적 약자 지원’이라는 명분 아래 조성된 혈세가 운동권 인맥과 정권 카르텔을 유지하는 데 쓰이는 구조는 이미 고착화되고 있으며, 그 비용은 결국 권력이 아닌 국민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이토록 진보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사회 속에 항상 새로운 “피해자 서사”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스스로를 ‘도덕적 대표자’로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피해자 정치학(victim politics)’이다.

이러한 정치 방식은 개인의 책임과 자유 보다 집단의 감정과 분노를 동원하는데 의존한다는 점에서, 진보가 표방하는 언어와는 다르게 집단주의적 통제 구조, 즉 공산주의적 정치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이 논리 구조 아래에서는 국민이 행복해질수록 그들의 정치적 존재 이유는 줄어든다. 따라서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문제를 유지,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동력을 얻는다.

빈곤이 줄어들면 “불평등의 구조는 여전하다”고 외치고, 복지제도가 확충되면 “진정한 정의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끊임없는 불만과 분노의 자극이 그들의 정당성을 유지해주며, 결국 이들의 정치적 생명은 국민의 고통 위에서 자라는 셈이다.

문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에 있지 않다. 한국의 정치 시스템 자체가 청렴한 인물을 배제하는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자금, 인사 네트워크, 공천 시스템, 언론 생태계 모두가 “기여하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깨끗한 정치인은 동료들에게 위협이 되고, 그는 “함께 해먹지 않기 때문에” 신뢰를 받지 못한다.  이러한 체제는 부패를 범죄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부패를 ‘협력’이라 미화한다. 결국 청렴은 배척되고, 타협과 추종이 생존의 기술이 되는 것이다.

한국 정치에서 이념은 언제나 언어적 장식이었을 뿐, 실질은 모두 그들의 이익이었다. 그러므로 좌파가 보수를 향해 “기득권의 하수인”이라 비난할 때, 그 비난은 거울 앞에서 중얼거리는 독백에 불과하다.  

보수는 부자를 이용하고, 진보는 가난한 자를 이용한다. 차이는 “이용의 대상”이지 “도덕성의 수준”이 아니다. 보수의 부패는 거래의 냄새가 나지만, 진보의 부패는 성스러운 언어에 포장된 사기다.

'탐욕'보다 더 위험한 것은 '위선'이다. 탐욕은 적어도 솔직하지만, 위선은 정의의 얼굴을 쓰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진보의 부패는 그래서 더 교묘하고 더 잔인하다.

부자를 상대로 한 부패는 탐욕의 문제이지만, 가난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부패는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도둑이 금고를 털면 죄이지만, 약자를 구호한다는 명분으로 약자의 절망을 이용하는 자는 인간의 양심을 훔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국민에게 '보수' 와 '진보'라는 두 썩은 선택지만 남은 현실은 비극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차라리 부자를 이용하는 부패가 덜 비열하다. 그것은 탐욕의 범죄이지만, 가난한 사람의 눈물과 고통을 팔아 권력을 취하는 행위는 도덕의 사기이며, 인간 양심에 대한 모욕이기 때문이다.

정치학의 언어로, 이것은 단순한 부패(corruption)가 아니라, 도덕의 전복(moral inversion)이다. 정의의 이름으로 불의를 저지르고, 도덕의 언어로 타락을 정당화하는 순간, 그 사회의 정치문화는 이미 병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직면한 질문은 단순하다. 우리는 과연 어떤 정치에 속고, 어떤 정치에 길들여져 살아왔는가? 그리고 언제까지 우리는, 이 도덕의 전복을 ‘정치’라고 착각하며 받아들일 것인가?

출처: Jean Cummings 페이스북 2025.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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