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정보 큐레이션/국내외 사회변동外(2)

■■[건국전쟁] 학교 복도 벽에 걸렸던 6.25때 다리가 폭파된 사진... 한강이냐? 대동강이냐?■■

배셰태 2024. 2. 15. 08:43

※한강이냐? 대동강이냐?

1. 사진이 정확하다고? 선전의 도구가 될 수도...

우리 중고등학교 다닐 때 내 기억에 뚜렷이 남은 사진... 폭파로 휘어진 저 철교 사이에 사람들이 매달려 필사적으로 도망가고 있다. 6.25 때 한강다리 폭파 사진이라고 제목이 붙어 학교 복도 벽에 걸렸던 사진...

훗날 좌파들은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이 쓴 <국민은 적이 아니다(2014년)> 책과 이 사진을 근거로 한강 다리 폭파 당시 피난 가던 민간인 최대 800명이 한강 다리 폭파로 죽었다는 거짓말을 나불거렸다. 그렇게 학교 교실에서는 아이들에게 거짓을 가르쳤고...

그러나 휘어지고 뒤틀린 철교 사이로 매달려 가는 사람들이 담긴 이 사진은 폭파된 한강 다리 사진이 아니다!

6.25때 평양 대동강 다리가 폭파된 사진이다. 1.4 후퇴가 진행되자 폭파된 대동강 철교 넘어서 북한 인민들이 남으로 피난가던  비극을 담은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 그는 이 사진으로 훗날 퓰리쳐 상을 받았다.

2. 폭파된 한강 다리 사진을 보니 민간인들은 부교로...

6.25가 터지고 북한군의 탱크에 국군이 밀리고 서울이 함락당할 것이 유력해지자 육군참모총장 채병덕 소장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한강 다리 폭파를 명령했다. 적 탱크의 진격 속도를 늦추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6월 28일 새벽 세 개의 철교와 1개의 인도교를 폭파했다.

피난 가던 사람들은 인도교 근처에 설치된 부교를 이용하여 이동 중이었기에 민간인 피해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강 다리 폭파시 군경 수십 명이 안타깝게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전에 충분한 예고 없이 너무나 갑자기 한강 다리가 폭파됨으로 후퇴하던 국군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지적이 일어나는 대목이다.

그런데 이를 놓고 민간인들이 피난 가고 있는데도 이승만이 폭탄을 터트려 다리에 있던 수백 명이 죽었다는 좌파들의 거짓 선전선동이 지난 수십 년 동안 계속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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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통해 남으로 남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사진 2 , 사진 3: 이 비극의 장면을 카메라에 담은 종군기자  맥스 데스퍼(Max Desfor)

사진 4 : 폭파된 한강 인도교 옆의 부교로 피난 가는 사람들(1950년 6월 28일 폭파됨)

출처: 오종문 페이스북 2024.02.14
https://www.facebook.com/share/XpLLH4rxLCrVANf9/?mibextid=oFDk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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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전쟁 비사] 여러분이 얼마나 속고 있었는지, 확실히 보여주는 사진 한 장. 한강 철교(인도교)가 아니라 대동강 철교였다
(정광용TV '24.02.13)
https://youtu.be/rm_K_rglmq0?si=tuEc5svoni_yFp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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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번 포스팅한 내용인데 요약해서 재포스팅한다.(**아래 첫번째 댓글 참고요 - 신창용 페이스북**)

김대중 김영삼 모두 치열하게 박정희와 싸웠지만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몰지 않았다. 그리고 이승만도 그런 친일파 프레임으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본인들 포함해 거의 모든 국민이 일제시대를 경험했고 그 시대는 현실이었고 친일파라는 무시무시한 악마는 인위적으로 만든 존재였다. 친일파도 크게 보면 조선의 백성들을 수탈해왔던 조선 사대부 양반들의 변신이었다. 어떤 면으로는 일제시대가 되며 조선의 일반백성들의 삶은 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여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백성들을 쥐어짜던 조선 사대부 양반들 대신 조선에 들어와서 살던 일본인과 그들에 협조를 했던 일부 친일파 조선인이 있었을 뿐이다. 도리어 그들이 가했던 고통은 조선 사대부 양반놈들의 것에 비하여 약했다. 이는 나의 소설이 아니라 여러 종류의 실증적 연구가 많이 되어 있는 주장이다.

이런 시대를 같이 경험한 동시대인이 같이 살고 있는 시기에 친일파 악마론이 미쳐 날뛸 공간이 없었다. 그리고 심지어 김대중도 지금 좌파들이 이야기하는 친일파 기준으로 보면 자유로울 수 없는 삶을 살았다. 이는 김대중 뿐만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조선인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친일파 논쟁의 저들이 우파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 것은 언제쯤일까? 이런 친일파 논쟁은 70년대부터 있었지만 저들의 확실한 무기가 된 것은 80년대 주사파들이 좌파 운동의 주류가 되고 난 다음이다.

주사파는 김일성주의자들이다. 김일성은 김성주라는 소련군 장교 출신이다. 소련군 장교가 되기 전 중국 만주에서 화적떼와 같은 삶을 살았던 김성주가 당시 만주지역에 항일투쟁으로 이름이 알려진 김일성으로 조작되고 조선 북부의 지도자가 되는 당위성을 김일성의 항일투쟁에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야욕을 무산시켰던 이승만은 김일성의 철천지 원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이승만을 이어 또 다른 원수 박정희가 만들어 가는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흔들기위해 등장한 이념전쟁이 친일파 논쟁이다. 항일투쟁에 빛나는 김일성은 정의이고 이승만 박정희와 친일파 혹은 친일파 비호세력들은 불의라는 어이없는 선전전에 속절없이 무릎을 꿇은 것이 지난 40년의 한국 정치사다. 그런 정치사에 빨대를 꽂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집단이 86운동권과 그 추종세력이다.

이런 역사를 알면 알수록 운동권86과 그 추종세력들의 청산이 대한민국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과제인지 새삼 확인하게 된다.

출처: 신창용 페이스북 2024.02.13
https://www.facebook.com/share/p/jk8wN4DBwjcyGvsa/?mibextid=2JQ9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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